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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늘 푸른 청년, 박형규 1

폭력배들한테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와 교인들이 거리에서 예배를 본다. 그것도 경찰서 앞에서. 헌데도 교인들을 이끄는 목사는 성직자라기보다 지휘자나 무대감독에 더욱 어울린다. 그의 손짓에 따라 교인들은 더위도 추위도 잊은 채 찬송가를 부르고 신명나게 박수를 친다. 누구보다 흥을 돋우는 건 어깨춤을 추는 목사다. 그가 깡패들한테 얻어맞아서 입원까지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교인들은 목사와 한 몸이 되어 엄지손가락을 펴면서 ‘자유, 정의, 민주, 민족, 자주, 평화, 통일’을 부르짖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서 ‘통일! 통일! 통일!’을 마음껏 외친다. 교인들뿐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들도 속이 다 후련하다. 군사정권의 폭압을 잠시나마 날려버리는 순간이다.

그는 어느 해, 아내와 아들이 동시에 구속되는 불행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손수건을 높이 들고 나긋나긋 아리랑 춤을 추며 돌았다.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 낭만이 넘치는 인격자와 민주주의 건설의 마지막 증인이라니, 고난을 나누는 공동체와 십자가를 진 광대라니,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듯 싶지만 그는 고통 받는 사람들이 모이면 놀이판을 벌이는 춤추는 목사다.

남산야외음악당 부활절연합예배 사건

1973년 7월, 신문에 “내란음모기도 15명 검거, 목사 등 넷 구속, 11명 즉심”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해방 후, 반공을 바탕으로 친정부적인 성향으로 일관했던 기독교계에서 목사가 내란음모를 기도했다는 사건은 교회와 사회에 충격을 던졌다. 청계천이나 성남에서 빈민 활동에 전념하던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와 서울 제일교회는 유신 선포 직후 숨 막히는 사회 분위기를 견디다 못해 독재자 박정희가 회개하기를 바랐다.
박형규는 부활절 기념예배를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과 생존권이 위기에 처한 빈민들의 삶을 알릴 기회로 삼았다.
“플래카드라고 해봐야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 ‘선열의 피로 지킨 조국 독재국가 웬 말인가’ ‘서글픈 부활절 통곡하는 민주주의’ ‘사울왕아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따위 온건한 기도문이 고작이었어요. 그나마 예배 현장에서는 경찰 병력에 둘러싸인 탓에 플래카드는 펼쳐보지도 못했고 2천 장을 찍은 전단도 몇 장 뿌리다가 흐지부지 되고 말았지요.”

잠잠하던 부활절예배가 문제가 된 건 두 달이 지나 검거선풍이 불면서였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로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파괴한 박정희 정권은 기독교계의 반유신활동을 탄압하기 위해 부활절 사건을 터무니없이 부풀렸다.
검찰은 “……이들은 지난 4월 22일 부활절 연합예배일을 거사일로 결의, 남산 야회음악당 부활절 예배 장소에 모인 10만여 군중 속에 ‘민주주의 부활은 대중의 해방이다’ ‘자유를 위해 종을 울리자!’ 라는 내용이 적힌 전단을 뿌렸으며 플래카드를 들고 행동대원이 4개 방향으로 유도, 이를 저지하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면서 중앙방송국을 점거, 중앙청을 비롯한 관서들을 점령할 계획 등 내란음모를 기도했다.”라고 보안사의 송치 의견서를 그대로 베낀 공소사실을 발표했다. 이는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이었다.

 공판정에서의 변호인 반대심문의 한 대목을 보자.

문(한승헌 변호사) : 부활절 예배 때는 주로 어떤 연령층 사람들이 모이는가요?
답(박형규 목사) : 중년 이상의 신자들, 그 중에서도 부인네들이 많이 모입니다.
문 : 무엇을 가지고 옵니까?
답 : 찬송가와 성경을 가지고 오지요.
문 : 혹시 각목이나 흉기 같은 것을 가지고 예배에 나오지는 않는가요?
답 : 그런 일은 없습니다.
이때 법정은 폭소로 뒤덮였다.

정권 전복을 기도하고 내란을 음모했다는 행동대원이 기껏 플래카드와 전단을 갖고 예배 장소에 나왔다는 것이고, 그나마 몇 명인지도 안 밝혀졌다. 결국, 재판에서 박형규는 이틀 만에 보석금 10만 원을 내고 석방되었다. 박형규로서는 첫 구속이었던 이 사건은 유신독재 치하에서 인권운동에 불을 붙인 셈이었다.

워낙 오랜 시간이 지나 잊혀졌던 이 사건은 1987년 6월 항쟁이 있고, 재판의 시효 15년이 끝나기 직전에 무죄가 선고되었다.   

인간의 숭고함을 보여준 어머니

“부활절 사건으로 재판을 받을 때였어요. 내 주장을 펴되 부드러운 말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한승헌 변호사의 반대 심문이 약간 진행되었을 즈음인데, 갑자기 웬 여자가 뒤에서 호통을 치는 겁니다. 놀라서 돌아보니 어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서 고함을 지르지 뭡니까. ‘사내자식이 말을 하려면 바른말을 제대로 해라. 했으면 했다 하고 안 했으면 안 했다고 하고 비굴하게 굴면 안된다. 비굴하게 굴지 마라!’ 버럭버럭 고함을 지르는 어머니를 보자, 어이쿠 어머니가 와서 보고 계시는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냈지요. 밤새 준비했던 부드러운 말들은 다 집어치우고 당당하게 내 주장을 펼쳤지요.”

그날 진술을 마치고 구치소로 돌아가면서 박형규는 다시 한번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자신의 양심과 정신이 자유로워졌기 때문이었다.
어린 박형규의 집안은 어느 날 갑자기 파산하였다. 집달리가 온 집안에 딱지를 붙이자, 갓난아기인 막내를 업은 어머니는 9살 박형규와 6살 누이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겨울날 30리 길을 걸어야 했다. 이윽고 지나가던 택시가 왔고, 어머니는 운전사가 공짜로 태워준다는데도 한사코 택시에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택시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 택시는 기다리고 있었고, 운전사가 아이들만이라도 타라고 했건만, 어머니는 그냥 가라고 손사래를 쳤다. 고집을 피우던 어머니는 운전사와 한참이나 실갱이를 벌인 다음에야 마지못해 차에 올랐다.
이튿날 어머니는 이모를 시켜 운전사를 불러오게 했다. 그리고 요금을 주었다. 그러나 기사는 애들이 가여워서 그랬노라고, 안 받겠다고 뻗댔다. 주겠다, 안 받겠다 입씨름을 벌이던 어머니는 “추운 겨울날, 아이들에게 먼 길을 걷게 해서 값비싼 훈련을 시키려고 했던 참이었다. 당신이 동정심을 발휘해서 우리 애들 교육을 방해했는데, 차비까지 안 받는다면 우리 애들을 망치는 꼴이다.”라고 운전사를 설득했다. 그제야 운전사는 혀를 내두르며 차비를 받았다.

일본으로 건너간 박형규의 집안은 오사카에서 막노동하는 조선인들과 어울려 빈민촌에서 살았다. 10년에 걸친 천대와 가난한 삶이 시작된 셈이었다. 일본 초등학교에 들어간 박형규는 어머니 덕분에 따로 한복을 입고 한글을 배웠다. 야간 한글서당에서 선생님한테 ‘흥부전’, ‘심청전’, ‘춘향전’을 들으며 우리의 역사와 독립정신을 배웠다.

“새벽에 어머니와 함께 손수레를 끌고 채소시장으로 가지요. 왜인들이 버리는 배추 껍질이나 상한 고구마를 줍는 겁니다. 그것으로 김치를 담고 삶아먹곤 했지요. 어린 나이였지만 구차스럽게 여기지 않았어요. 가난하지만 인간의 존엄과 도리를 지켜 나가는 숭고한 삶의 의지를 그때 어머니한테서 보았지요.”

 

소작료 충격과 해방

일본에서 뼈저리게 가난을 겪은 박형규로서는 소작농의 비참함을 그대로 넘기기가 몹시 힘들었다. 1943년 가을이었다. 아버지의 명을 받은 그는 집안 서기 일을 하는 사람과 소작료를 받으러 나갔다. 논을 서너 마지기 부치는 노인의 집에 들어선 서기가 소작료를 내라고 하자, 20살쯤 된 딸이 방안에서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분노에 차서 외쳤다.
“당신네 땅 서너 마지기로 우리가 먹고사는 줄 아느냐, 그것 가지고는 살 수가 없다. 내가 부산 가서 몸을 팔아 가지고 부모를 봉양하고 있다. 우리는 당신들이 달라는 대로는 못 준다. 가져가려면 다 가져가라!” 여자가 삿대질을 해대자 박형규는 몹시 부끄러웠다.

그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재산의 3분의 1을 자신의 앞으로 해놓았다는 아버지에게 고백했다. “아버지, 저는 지주노릇을 하는 게 싫습니다. 소작인들 사정이 딱합니다. 우리는 그것 없이도 살아갈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지주노릇은 못하겠으니 제 몫은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너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놈이다.” 한마디로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싶은 박형규의 소박한 꿈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폐결핵 때문에 징집을 면한 박형규는 해방이 되면 어린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칠 셈이었다. 한글독본을 동무들과 몰래 공부하던 그는 그만 일본 경찰에 잡혔다.

“내 생애에 그렇게 심한 고문을 당해본 적이 없어요. 군사독재 아래서 감옥을 여러 차례 들락거렸지만 그때처럼 고문을 심하게 당하지는 않았어요. 온몸을 묶은 채 몇 시간이나 천장에 거꾸로 매달았는데, 너무 고통스러워 혀 깨물고 죽고만 싶었지요. 헌데 얄궂게도 거꾸로 매달아놓으니까 혀가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아요. 나를 고문한 이는 ‘이토오’라는 일본 이름을 가진 조선인 순사였는데, 한글을 배우고 비밀조직을 만들어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자백을 하라고 때리고 달아매고 닦달을 해댔어요.”

우여곡절 끝에 석방된 박형규는 첩자 노릇을 하라는 헌병대와 형사의 협박을 피해 상주로 피신했다. 절집에서 몇 달 숨어 지내던 그는 세상 돌아가는 게 하도 궁금해서 1945년 8월 14일 밤에 몰래 집에 들렀다. 부모님은 몹시 기뻐했지만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래서 하룻밤만 자고가기로 했다. 그동안 결혼반지를 빼앗기고, 숟가락까지 걷어갔으며, 박형규를 잡아가려고 4주에 한번 꼴로 순사가 찾아왔다는 거였다.

이튿날 8월 15일은 그의 동무 한 명이 징병소집장을 받고 떠나는 날이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날 낮 12시에 열린 송별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진영 역의 역부로 있던 입영하는 동무의 형이 라디오 방송을 듣고 달려왔다.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했다는 기막힌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게 사실이냐고 묻자, 그는 분명히 들었다고 거듭 확인해 주었다. 박형규는 동무들과 환호성을 질렀다. 그는 동무들을 부둥켜안고 울면서 ‘울밑에 선 봉선화’를 부르며 만세를 외쳤다. 감격어린 눈물로 범벅을 한 채 울고 웃으며 맞이한 해방이었다.

민청학련 사건 배후 조종자로 몰리다

“민청학련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의 운동도 아니었고 사회주의자들의 운동도 아니었습니다. 정부를 전복시켜 정권을 장악하려는 정치운동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요, 민족의 생존을 위한 역사적 투쟁의 전통을 이어받은 당당한 민족운동이요, 자유운동이요, 민권운동입니다……. 우리의 백성들은 바른말을 했어야 하는데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치가도 변호사도 목사도 모두 ‘말 안 하기주의’였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땅, 그것은 강도질과 폭력이 자행되는 땅입니다. 지금은 그럭저럭 살아가는지 모르지만 악법과 폭행을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다 아는 일인데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까 젊은 사람들이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법정에서 박형규는 학생들의 행위가 올바름을 말했다. 1974년 봄,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이 대한민국은 겨울공화국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1,024명이 수사를 받았고, 253명이 군법회의에 송치되었다. 인혁당 관계자 8명과 민청학련 관계자 6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관계자 대부분에게 무기징역이나 10년 이상 징역이 떨어졌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정부를 전복하고 임시 과도 연립정부를 거쳐 공산정권을 수립하고자 한 국가변란 기도 사건이라고 발표하였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청년학생들의 반유신활동을 공산주의자가 저지른 불순활동으로 몰아갔다.
학생들은 박형규에게서 받은 돈을 지방 학교와 연락할 때, 수배 중인 동료들이 묵을 장소를 마련하거나 유인물 제작에 필요한 장비를 구하는데 썼다. 박형규는 자신의 주머니를 털고, 대부분은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윤보선과 이우정을 일부러 끌어들였음을 고백했다. 왜냐하면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부정부패척결, 노동악법 철폐, 자립경제체제 확립을 요구하는 성명을 낸 학생들을 보호해야 했다. 공산주의자로 내몰린 학생들이 빠져나갈 길은 확실한 신분을 가진 사람을 많이 끌어들이는 길밖에 없었다.

그 무렵 빈민의 고통을 절감하고 독재정권을 향해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그를 지식인들과 교회 관계자들은 바보 같은 목사로 여겼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학생들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이런 분위기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뭔가 몸부림치겠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그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누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학생들 꽁무니를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서대문구치소에 앉아 있게 되더군요. 나를 두고 배후 조종이라 운운하지만, 사실 나는 순진하게도 학생들 꾐에 빠진 꼴입니다.”  

글 / 윤동수
1960년생
1990년 사상문예운동 겨울호에 「새벽길」 발표
2003년 평전 『윤상원』 발간
2004년 단편 「바람 속의 거미집」을 『문학과 경계』 여름호에 발표

 

- 춤추는 늘 푸른 청년, 박형규1 
http://www.kdemo.or.kr/blog/people/post/229

- 춤추는 늘 푸른 청년, 박형규 2

http://www.kdemo.or.kr/blog/people/post/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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