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으로 바로가기

d-letter

제자의 발을 씻는 맘으로, 윤영규 1

제자의 발을 씻는 맘으로, 윤영규 1

이틀째 광주에 폭설이 내리던 날, 기아자동차 노조의 부패한 행태를 바라보는 그이의 심정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노조 간부들이 비정규직으로 입사하려는 사람들에게서 돈을 받아 챙겼다니, 도덕성이 생명인 노동운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노조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입사청탁을 한 사람들의 명단이 언론에 오르내릴 때마다 그이는 머리끝이 쭈뼛 선다. 광주의 어른으로서 사과성명을 발표하러 가면서도 발걸음을 떼기가 몹시 조심스럽다. 눈길이 미끄러워서만은 아니었다.
그이는 사위가 기아자동차에 취직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입사원서를 낸 딸은 은근히 전화 한 통이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이는 시침을 뚝 떼고 모른 척했다. 교육운동 한답시고 수배다 감옥이다, 애비노릇도 제대로 못한 처지에 딸의 부탁을 거절하기란 몹시 힘들었다. 남들 몰래 윤 아무개 사위라고 귀띔이라도 했으면 사위는 취직이 됐을지도 몰랐다. 명색이 기아자동차의 자문위원장이 아닌가.
그러나 그이는 사위가 취직이 안 됐음을 알고 나서도 끝내 모른 척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 했다. 딸한테 눈이 멀어 그릇된 판단을 했더라면 지금쯤 낯을 못 들고 다녔으리라. 늙었다는 핑계로 허튼 짓을 했더라면 교육운동에 바친 한평생이 물거품이 되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칠순이 다 된 나이건만 민주화운동은 올바름이 바탕이 되어야 함을 뼈저리게 느낀 나날이었다.

유신의 올가미에 걸려들다

1976년 2월 10일 아침, 광주상고에서 가르치던 선생 윤영규는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소도 도살장으로 끌려간다는 것만은 눈치 챈다고 하지 않던가. 그이는 ‘아, 어디로 잡혀 가는구나’ 하는 직감이 퍼뜩 들었다. 3학년 담임인 그이를 친절하게 그곳으로 데리고 간 이는 교감선생이었다. 교육자라도 독재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마다하지 않아야 살아남는 세상이었다. 신성해야 할 교단은 정권의 노리개가 된 지 오래였다.
조사실에 들어서자마자 그이는 군홧발로 정강이를 채이기 시작해서 사흘 내내 초주검이 되도록 맞았다. 뭘 묻지도 않고 무조건 두들겨 팼다. 남들한테 말만 듣다가 처음 당하다보니 얼마나 겁을 먹었던지 바짝 탄 입술이 두 꺼풀이나 벗겨졌다. 죄명은 긴급조치 9호 위반.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이는 중앙정보부 광주분실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린다.

“형광등 하나 켜지지 않은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다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고 대리석 바닥에 놋쇠로 새겨놓은 걸 보자 온몸에 소름이 좍 끼쳤어요. 지하라서 음산하지,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으면 200~300촉짜리 백열등은 쏟아지지. 그러면 책상 저 쪽에 앉은 수사관은 보이지도 않아. 강렬한 불빛만 눈앞을 채워버리지. 그 와중에도 주변을 흘끔거리니까 사방 벽이 핏자국이야. 귀퉁이엔 몽둥이, 각목, 자전거 체인……. 고문기구가 살벌하지. 아무리 배짱이 두둑한 사람이라도 기가 팍 죽어버려요.”

1975년에는 고등학생들이 유신헌법을 철폐하라고 시위를 했다. 광주고 학생들이 금남로, 충장로에서 시위를 했다 하면 광주상고생들도 나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밖으로 뛰쳐나가려다 사전에 경찰에 발각되면 꼼짝없이 학교에 머물러야 했다. 피가 끓는 고교생들은 운동장을 돌면서 악을 쓰거나 울고불고 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던 어느 날 유신체제를 비난하는 유인물이 교실마다 깔렸고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유인물을 읽어본 그이는 무척 놀랐다. 수업시간에 자신이 했던 강의내용이 유인물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가 부러지고 허리를 못 쓰게 두들겨 맞으면서 그이는 학생들의 배후조종자로 내몰렸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아예 유인물을 뿌린 장본인으로 둔갑했다. 20일 동안 깨지고 터지면서도 윤영규는 한사코 부인했다. 수사관들은 집에서 압수한 함석헌, 장준하, 김재준 선생하고 함께 찍은 사진을 들이대며 재야의 숨은 실력자로 몰아갔다. YMCA 청소년지도자 모임을 만들어서 10대들을 수천 명씩 모으는 행사를 열었음을 그들은 증거로 들이댔다. 10대 청소년들의 모임마저 불온시하는 그들에게서 그이는 유신체제의 악랄함에 몸서리를 쳤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들려준 얘기라고 해봐야 보잘 것 없었다. 가끔 국민의 입과 귀를 막는 유신헌법은 잘못 됐다거나, 월남 파병은 국민의 목숨을 팔아먹는 짓이라든지, 호남 푸대접론 따위를 슬쩍 흘렸을 따름이었다. “야 이놈들아, 너희들은 평생 남의 돈이나 세다 죽을 거냐?”고 암울한 세상에도 눈을 돌리라고 거들거나,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한테 표를 많이 던진 구례나 곡성 출신 학생들에게 호통을 친 게 고작이었다

쥐고기를 먹고 풀빵을 굽다

그이는 야간고교 중퇴 학력만으로 한신대학에 들어갔다. 천형 같은 가난 때문이었다. 칠공주의 아비인 윤영규는 6대 독자다. 하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형님과 누님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죽었다. 특히 그이는 쌍둥이 동생의 죽음을 못 잊는다. 그 동생은 전염병에 걸려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어머니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동생의 뺨을 고무신으로 갈기며 “다시는 사람 사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라.”고 울부짖다 까무러쳤다.
그이는 광주천 오두막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징용을 피해 잠시 화순에 머물렀던 때를 빼고는 10대 후반이 되도록 광주천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남의 집 장작을 패주고 막걸리를 얻어 마시거나 노름으로 세월을 보냈다. 땅 한 평, 집 한 칸 마련할 능력이 없었다. 일본사람 집에서 식모살이를 한 어머니가 얻어 온 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광주천의 움막이라고 해봐야 강변 석축에 거적이나 나무 판때기를 걸친 게 전부였다. 천변 계단과 잇닿은 자리에 방을 들여서 살림을 했다. 비닐을 깔고 그 위에 가마니를 덮은 게 방바닥이었다. 그리고 흙으로 빚은 화로에 나무를 때서 밥을 끓여먹었다. 정미소 변소간 옆에 오두막을 짓고 살 무렵, 어머니가 무슨 마른 고기를 주었다. 맛있게 먹고 나니 그건 쥐고기였다. 이북 사람들이 피난 온 다음에 개고기가 널리 퍼졌지, 그때까지 남녘에서는 개고기를 잘 먹지 않았다. 나중에야 개고기 먹은 기억도 있지만, 하여간 어머니가 주신 그 쥐고기를 배가 고팠던 그이로서는 맛나게 먹었다.

“풀빵을 구울 때마다 학생모를 쓰고 지나가는 친구들을 보면 자존심이 상해서 미쳐 버리겠더라구. ‘앙꼬’라는 팥소도 없이 그저 사카린을 탄 반죽으로 구워내는 거였어요. 하지만 천변 동네 애들한테는 인기가 대단했지. 그 무렵 광주 시 금동, 양림동 일대에 살았던 애들은 아마 다 내가 구운 풀빵 하나씩은 먹어봤을 거야.”

초등학교 5학년부터 그이는 7,8년을 풀빵을 구워 팔아 생계를 꾸렸다. 유일한 낙은 어려서부터 외로움을 견디게 해준 책읽기였다. 숱하게 풀빵을 태웠지만 그이는 한순간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에서도 그이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신문배달, 영어 가정교사, 영화 포스터 붙이기, 아이스케키 통 짊어지고 얼음과자 팔기, 지게에 똥장군을 지고 똥 푸기, 연탄 배달, 야간 경비, 지게 품팔이, 서점 점원에다 심지어 서울역 앞 양동에서 몸을 파는 아가씨들에게 <명랑>, <아리랑>, <야담과 실화> 따위 도색잡지까지 팔았다.

“물만 들이켜다 나흘을 굶은 날이었어요. 도저히 서울생활을 견딜 수 없어서 광주 내려갈 차비라도 빌리자고 의대 다니는 친구한테 갔지요. 굶어죽을 판인데, 이 친구가 불을 끄고 바이올린을 연주할 테니 들어보라는 거예요. 허기를 악착같이 참으며 웅크리고 있자니 상처 입은 짐승이 따로 없었지요. 갑자기 나도 모르게 서울생활이 스쳐지나가면서 뜨거운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지요. 그때 친구가 깜짝 놀라 불을 켰는데, 그 환한 불빛이 미치게 싫었지요.”

 

인생에서 가장 비겁했던 순간

“무등갱생원 사람들이 했던 말이 평생 내 가슴을 찔러요. 지금도 여전히 진짜 애국자는 그네들이고 우리는 가짜였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요.”
5·18민중항쟁 기간 동안 교사 윤영규는 수습위원으로 참여했다. 수습위원들이 여러 번 바뀌면서 총기를 거두어들이는 일이 가장 큰 문제로 떠올랐다. 비폭력을 내세우고 4천여 정이나 되는 총기를 긁어모았다. 그러나 36인조 무장 대기조는 끝내 총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수류탄과 대검, M16 소총으로 중무장 한 채 함께 행동했다.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총기를 내놓으라고 하자,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선생들만 애국자요? 우리도 애국 한번 합시다!” 하고 씹어뱉듯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등갱생원에서 나왔음을 밝혔다. 총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밥이라도 한 끼 얻어먹는다는 거였다. 총을 내놓으라는 것은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이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고 흥분했다. 윤영규는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네들은 항쟁이 끝난 다음에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아마 그들은 마지막 날 밤 계엄군과 싸우다 모두 죽었으리라. 그이는 무등갱생원 원생들이나 넝마주이, 구두닦이, 중국집 배달원들이 5·18의 주역임을 잊지 않고 있다.

“죽음의 행진을 마치고 조아라 어머니께 장례위원으로 도청에 들어가 계시라고 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늦도록 집에 안 오셨다는 거야. 여기저기 YWCA도 알아봤는데, 안 계시더라구요. 친구 어머니를 모셔다 놓고 뒷수발을 제대로 못했으니 책임감을 느꼈지. 27일로 넘어가는 밤, 그러니까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던 밤이었지요. 지칠 대로 지쳤으면서도 도청에 들어가야지, 그래도 가야지 하는데 어찌 그리 무서운지.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는 도청에서 나와서 딴 데로 가셨다더군. 그런데 나는 그걸 모르고 책임감 때문에 계속 들어가려는데, 무언가 계속 등을 끄집어 당겨서 딱 주저앉아 버렸어요. 아무리 도청엘 들어가려고 해도 무섬증에 꽉 붙들려버렸어. 그래서 슬금슬금 전일빌딩 옆 골목으로 들어갔지. 그 길로 내처 집으로 가서 쓰러져 잠들었어요. 27일 새벽에도 ‘시민들이여 학생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도청 앞으로 모입시다’는 방송을 듣고서도 나가야지, 나가야지……. 마음만 오락가락했지. 내 일생에서 가장 비겁한 순간이었어요.”

 

교육운동에 발을 내딛다

1986년 전두환 정권의 집권 연장 음모를 막으려는 4·13 호헌철폐운동이 전국으로 퍼졌다. 대학 교수들이 반대서명운동을 벌이자 교사들 사이에서도 서명운동에 참여하자는 열기가 들끓었다. 그러나 YMCA 교사협의회를 이끌던 윤영규는 교사들의 서명운동에 반대했다. 왜냐하면 대학 교수들하고 달리 초·중·고 교사들은 정치문제를 가지고 의견을 밝혔다가는 가혹한 보복을 당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만든 교사협의회가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입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윤영규는 이 참에 교육문제를 주제로 해서 입장 표명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리하여 한국 교육사상 가장 획기적인 ‘5·10 교육민주화선언’이 나오게 되었다. ‘우리는 교육의 주체로서 국민의 교육적 요구를 올바르게 실천할 막중한 책임을 느끼며 교육의 민주화는 민주사회의 이념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바탕이라는 자각에서 새로운 교육건설의 역사적 과제를 짊어지고 모든 장애와 고난을 이기며 민주교육을 실천해 나갈 것을 오늘 엄숙히 선언’함으로써 4·19 이후 최초의 집단적인 민주교육운동의 횃불을 드높이게 되었다.
교육운동에 뛰어들고 나서 처음으로 감옥을 가면서도 윤영규는 영흥학교에서의 기억을 마치 무슨 교의처럼 떠올렸다. 목포 영흥중고등학교는 대학을 졸업한 그이가 처음으로 몸담은 학교였다. 그러나 한 달 만에 재단 분규에 휩쓸리고 말았다. 정치에 몸담았던 전임 재단 목사가 현 재단 목사에게서 학교를 빼앗으려고 하면서 빚어진 싸움이었다. 다시 학교를 집어삼킨 전임 재단 측이 요구한 백지 위임장에 도장 찍기를 거부한 그이는 파면되고 말았다. 그이로서는 교육 현장에 회의를 느낀 최초의 사건이었다. 무자격 교사가 판을 친 그 학교는 교육비리를 몽땅 끌어 모은 전시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청년 교사인 윤영규를 가슴 아프게 한 부패한 교육현장은 또 있었다. 결혼을 앞두고 철학개론과 교육학 개론을 강의한 숙문여숙(송원대 전신)에서는 강사료 대신 백지 졸업장 40장을 주었다. 그 종이에 이름만 써서 팔아먹으라는 거였다. 그래서 윤영규는 ‘이 더러운 놈의 새끼’ 하고 이사장을 패대기치고 종이를 찢어버렸다.

“어디에서든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바른 말을 했다가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잘못된 권력이 탄압하면 저항해야지요. 고문을 받으면 어찌 될는지는 몰라도 저항하겠어요. 운동하는 사람은 그런 의식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자기 양심에 부끄럼이 없는 말을 하면서 살아야지요.”


글 / 윤동수
1960년생
1990년 사상문예운동 겨울호에 「새벽길」 발표
2003년 평전 『윤상원』 발간
2004년 단편 「바람 속의 거미집」을 『문학과 경계』
여름호에 발표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