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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는 나의 힘, 강은기 2

 



 

70년대 많은 청년들의 경우처럼 강은기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은 ‘한국의 간디’라 불렸던 함석헌이었다. 성경과 동양철학을 독특하고 자유롭게 풀이해 내는 함석헌의 사상과 불의한 정치권력에 맞서 ‘싸우는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는 강은기에게 어떤 ‘길’을 제시했다.
어릴 때부터 가져온 기독교 신앙과 출가의 경험, 불합리한 현실과 유신정권에 대한 저항감, 비체계적인 독서로 추상적인 고민만 불려 왔던 강은기는 함석헌과 그의 스승 유영모의 자택을 들락거리면서 비로소 자기 인생의 구체적인 목적과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인쇄 직공 할 때는 인쇄노동운동을 꿈꿨죠.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보면서 열악한 상황에서 혹사당하는 인쇄노동자들이 똘똘 연대해서 노동자가 주인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게 바람직하지 않나. 근데 사람들을 따르게 하려면 먹고사는 문제가 젤로 어렵드만. 뭘로 따르겠는가. 간디도 물레를 돌린다든지 해서 물리적인 기반도 나름대로 확충했잖아요. 함 선생님도 (씨알농장 등으로) 그 뜻을 분명히 따르고자 했을 거예요. 그래서 생각한 게 인쇄 공동체였어요. 공장시설 등 최소한의 물적 기반을 갖춘 공동운영을 생각했죠.”(강은기, 2002년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인쇄공동체를 꿈꾼 청년 돈키호테

공동체를 꾸리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움직일 최소한의 돈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돈 버는 일보다는 주로 ‘인쇄인의 사회적 소명’에 닿아 있었다. ‘정신력을 갖되 정신력을 팔아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우연히 이해학 목사를 통해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소책자를 발간하면서 그는 자신이 할 일을 깨달았다.
남들이 인정을 하건 안 하건 그는 ‘운동권’이었고 자신의 ‘활동’을 ‘기계 돌리는 행위’에 한정하지 않았다. 당시 유인물 인쇄에 으레 따르곤 했던 위험수당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을 독점하지도 않았다. 정보기관의 감시로 인쇄조차 힘든 상황이면 밤새 등사기로 밀거나, 아는 복사집에 맡겨서라도 일이 되게 만들었다. 『사상계』의 맥을 이어 창간된 『씨알의 소리』가 폐간과 복간을 거듭하고 있을 때는 제본도 못한 접지 상태의 책을 수십 부씩 들고 다니며 버스에서 팔기도 했다.(이해학, 『다시 그리워지는 함석헌 선생님』 중에서)



77년 뒤늦게 세진에 합류한 동생 강은식은 형이 하는 ‘사업’의 정체를 알고는 아연실색했다. 인쇄소는 ‘운동권 소굴’이나 다름이 없었고 낮이건 밤이건 ‘경찰 문 여는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밤새 작업한 인쇄물 박스를 겨우 밖으로 빼돌리면 미리 대기한 경찰과 마주치기 일쑤였다. 그 와중에 돈을 제대로 챙길 리 만무했다. 강은식은 복장이 터졌다.
“아니, 오갈 데도 없는 거 맡았으면 돈이나 좀 많이 받아야 할 거 아니야. 우선 나부터 살아야지. 한참 힘들 땐 차비가 없어서 걸어 다녔어요.

돈이 남지를 않는 거야. 민청련에는 프린트 인쇄기까지 쓰라고 갖다 줬어. 고장 나면 나보고 가서 고쳐 주래. 짜증이라도 내 봐, 당장 재떨이 날아오지.”(강은식)  

그 ‘불같은 성질’을 전북민주동우회(전민동) 회장 권형택은 ‘결기’라 표현했다.

80년 ‘김재규 항소이유보충서’를 찍어낸 뒤 계엄법 위반으로 3년 형을 선고받은 그는 옥중에서 이해찬, 장영달, 임채정, 오경렬 등과 교분을 맺었는데, 특히 한방을 썼던 오경렬과의 인연이 재미있다. 

“하루는 오경렬 형이 몹시 무례한 행동을 했나 봐요. 이 양반이 체격도 크고 힘이 좋으니까 못마땅해도 다

들 지켜보고만 있었겠죠. 근데 은기 형님이 그 자리에서 따귀를 올려붙인 거예요. 체구는 요만한 사람이 그렇게 결기를 세우니까 ‘요 쥐방울만한 것이 사람을 치네.’ 하고 씩씩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고 해요. 그 인연으로 둘이 더욱 가까워졌죠.”(권형택)



색다르게 다정한 사람

80년대가 도래하면서 세진인쇄의 사정도 다소 나아졌다.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운동단체도 많이 생겼고 다양한 선전홍보물이 숱하게 발간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인쇄비를 떼이는 일은 생겼으나 ‘반타작 하는 셈만 쳐도’ 경제적으로 한결 여유가 있었다.
82년 강은기는 대량 인쇄물의 신속한 제작을 위해 조판기능이 있는 청타기를 들여놓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조카 오혜정을 불러들여 청타를 치게 했다. 청타를 치려면 원고를 일일이 읽어야 하기 때문에 보안 유지를 위해 가까운 친지를 끌어들인 것이다. 91년까지 10년 동안 한솥밥을 먹었던 오혜정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데모하다 제적돼서 오갈 데 없는 젊은이들로 항상 북적거렸어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수두룩하죠. 다들 인쇄 일로만 찾아오는 게 아니에요. 외삼촌이 워낙 인정이 많아서 인쇄소 사정이 안 좋아도 때 되면 밥 사주고 차비 주고 도와주셨거든요. 어디서 선물이 들어오면 집에 갖고 가는 법이 없어요. 그 자리에 있는 사람 다 나눠 주죠. 그러니 다들 형님, 선생님, 장군님 하고 부르며 따랐죠. 직원들한테도 굉장히 잘해 주셨어요. 월급도 다른 데보다 후한 편이었고 8시간 노동제, 시간외 수당 등 줄 건 딱딱 챙겨 주셨어요. 바쁜 일 떨어지면 작은외삼촌하고 나만 죽어나는 거죠.”

영세한 인쇄업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때 인쇄노동운동을 꿈꿨던 강은기의 ‘초심’은 직원들의 노동조건에 그대로 반영되었던 모양이다. 4·19 전에 시작한 인쇄 경력이 20년을 넘기면서 그는 어느덧 을지로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았다. 러닝셔츠 위에 점퍼 하나 걸치고 조붓한 인쇄골목 한 귀퉁이를 차고앉아 마주치는 사람마다 웃음을 보내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촌구석의 ‘무골(無骨) 영감’이었다. 그러나 그럴 때 그는 보통 ‘세진’이란 이름으로 주문 받은 운동권 인쇄물의 총지휘자로서 다른 인쇄소와 제본소로 물건을 빼돌리며 ‘인쇄 유격전’을 펼치는 중이었다. 박계동이 부탁한 광주항쟁 화보집이나 민청련·민통련 기관지, 김세진 열사 자료집, 동아·조선투위와 청피노조 합법화투쟁 관련 유인물들이 다 그런 ‘유격전’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세진에 대한 감시는 점점 심해져서 그는 세진의 기계를 돌리는 일보다 을지로의 요소요소에 우호적인 제작처를 심어놓는 일로 더욱 바빠졌다.

80년대에는 인쇄 일을 배우겠다고 을지로 골목을 찾는 운동권 젊은이들도 많았다. 밥벌이를 위한 방편으로 인쇄를 택한 이도 있었고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목적의식적으로 인쇄를 배우려는 이도 있었다. 어떤 경우든, 강은기는 이들을 위한 유능하고도 깐깐한 조련사였다. 세진에서 기술을 배운 젊은이치고 강은기에게 욕 안 먹은 이가 드물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대뜸 ‘멍청하다’고 핀잔을 줘요. 그 사람들도 나름대로 똑똑하다는 소리 듣는 사람들 아니겠어요? ‘태어나서 멍청하다는 말 처음 듣는다.’고들 했죠. 근데 그게 왜 무시해서가 아니라 애정에서 나오는 말 있잖아요. 원래 욕도 잘하고 나무라기도 잘하시거든요.”(오혜정)

 ‘애정 어린 욕’을 먹어가며 강은기에게 일을 배운 젊은이들 중에는 대동인쇄 윤여연처럼 자기 인쇄소를 차려 독립하는 이도 있었다. ‘젊은 피’의 수혈을 받은 을지로는 아연 활기가 넘쳤다. 87년 6월항쟁의 경험과 젊은 인쇄 동지들의 출현은 강은기에게 새로운 꿈을 꾸게 했다. 88년 9월 3일, 그는 조판·오프셋인쇄·라미네이팅·표지·장정·도안·기획 분야에서 활동하는 24명의 인쇄인들과 함께 인쇄문화운동협의회(인문협)을 발족시키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그해 9월 10일자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인문협 발족의 취지를 이렇게 말했다.

“긴급조치, 포고령, 계엄령 때 유인물, 선언문, 성명서 등을 찍어낸 인쇄인은 영락없이 연행되거나 구류를 살았지요. 요즘도 여전하고요. 이런 문제들이 생길 때 수수방관하지 않고 서로 연대해 나가려는 게 앞으로 우리 인문협이 우선적으로 할 일입니다.”
같은 일에 종사하는 동료로서 서로의 이해가 상충될 때도 있었겠으나 강은기는 넉넉한 마음으로 이들을 보듬어 안았다. 대동인쇄 직원이었던 안삼화는 강은기를 ‘색다르게 다정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입이 걸어서 이름만 부르는 일이 거의 없어요. 항상 뒤에 ‘한 자’가 더 붙어요. 그런데 그게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지거든요. 참 색다르게 다정하신 분이었죠. 5·3 인천항쟁 때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 강 사장님이랑 같이 들어갔었거든요.



초범이라 잔뜩 겁에 질려 있는데, 강 사장님이 제 손을 꽉 잡으며 ‘삼화야,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 하고 다독거려 주셨죠. 그게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아요. 나중에 제가 독립한 후 우연찮게 세진의 거래처 중의 하나였던 모 단체 일을 맡게 됐어요. 나쁘게 생각하면 거래처를 뺏어 온 걸로 볼 수 있잖아요. 근데 어느 날 우연히 만났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삼화야, 그 단체 돈을 잘 안 주니까 잘 해서 받아라.’”

자기 자신을 역사의 쏘시개로 내민 ‘알찬 생’

그러나 90년대 초 인문협은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이라는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되었다. 막 보급되기 시작한 사회주의 이념은 자리를 잡기도 전에 재검토 대상이 되었고 한국의 오랜 민주화운동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비합법 지하조직이 설 자리를 잃게 되면서 합법적이며 공개적인 대중운동, 진보정당운동이 대안으로 모색되었다.

90년대 변화의 급물살 속에서 강은기의 게릴라식 인쇄방식은 새로운 사회에 부응하지 못하는 ‘낡은 마인드’로 인식되었다. 인문협의 ‘동지’들은 저마다 인맥과 학맥을 이용하여 활로를 모색하였다. 독재정권 하에서 강은기를 ‘형님’이라 부르며 인쇄를 맡기던 ‘동생’들은 TV에서나 볼 수 있는 ‘높은 사람’이 되어 갔다. 그들은 더 이상 낡은 구식 기계 한 대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형님’의 인쇄소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강은기는 과거의 인연을 팔아 치부할 마음도 ‘두툼한 외상 장부’에 적힌 낯익은 이름들을 원망하는 마음도 없었다. “두툼한 외상 장부를 내보이며 ‘나는 부자’라고 말” 할 뿐이었다. ‘받을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의식 있는 이 땅의 일꾼들을 자신의 치부책 속에 다 집어넣었으니 세상에서 제일 부자라는 말이다.’(김택근-경향신문 편집국 부국장)

‘옛정’을 생각해서 보증을 서준 그에게 ‘부도’로 보답한 이도 있다. 강은기는 누적된 부채와 만성적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사정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한 권형택은 때마침 연합통신 사장으로 부임한 김종철을 찾아갔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인 김종철은 강은기와는 동아투위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는 ‘세진이 요즘 어려우니 도와 달라.’는 권형택의 부탁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그는 강은기에게 고급 장정의 회지 하나를 내밀며 제작을 의뢰했다. 그런데 강은기는 그 회지를 쓱 훑어보더니 딱 잘라 거절했다. ‘못해요. 이런 고급지는 우리 기계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보통 사람 같으면 자기가 못하면 하청을 주더라도 일단 욕심을 내보지 않겠어요? 하여튼 그렇게 고지식한 양반이에요.”(권형택)
말년의 외로움과 가난 때문이었을까. 강은기는 여전히 허허로운 웃음으로 인쇄소 골목을 지켰지만, 90년대 말을 넘기면서 나이보다 겉늙은 그의 누런 얼굴은 눈에 띄게 초췌해졌다. 한 달에 한번씩 전민동의 벗들과 산에 오르는 게 낙인 세월을 보내던 2002년, 췌장암 선고를 받았을 때 그의 나이 60세였다. 생전에 가진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는 단지 이렇게 말했다.
“열심히 살아왔어요. 설령 죽음이 닥쳐도 당혹스럽지 않을 거예요. 다만 사람들과 맺은 관계를 털어 내기가 쉽지 않군요.”(한겨레21, 2002년 8월 9일자)
1월 9일, 평생을 독재와 싸운 그가 ‘마지막 투쟁’(김택근)을 끝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노무현 현 대통령을 비롯하여 김근태, 장영달, 방용석, 이해찬, 이부영, 심재권, 이강래, 이창복 등 재야운동가 출신 정관계 인사들이 보낸 화환들이 그의 위패를 모신 서울 보라매병원 영안실을 가득 메웠다.



“참 고마운 것은 딸 신영이 있죠, 딸애가 참 좋아요. 아버지 부채와 인쇄소를 고스란히 떠맡고서도 얼굴 붉히거나 짜증내지 않고 정성스럽게 아버지를 돌봤어요. 마지막에 딸에게 그렇게 위로받으면서 죽는 거 보고 ‘어느 누가 너보다 더 알찬 생을 살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 민주화를 꽃피우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살았던 사람, 분노도 원망도 없이 자기 자신을 (역사의) 쏘시개로 조용하게 내미는, 이런 삶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이 아닌가 …….”(이해학) 

  

<강 은 기>
1942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남
1958년 중학교 3학년 중퇴
1959년 남원의 인쇄소에서 2년 동안 활판 인쇄를 배움
1960년 3월 말 서울에 올라옴
1961년 5월 말 충북 보은군 법주사로 출가
1963년 중학교 동창인 이해학 목사와 만남
1964년~71년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인쇄공으로 일함
1972년 세진문화사 설립
1973년 KMCO 시위에 참가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보름 간 동부경찰서에 구금
한통련 기관지 『민족시보』 관련으로 중앙정보부에서 10일 간 조사 받음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서 제작 건으로 성남경찰서 연행
1978년 인권운동 관련 유인물 제작 건으로 서부경찰서 연행
1979년 허병섭 목사가 의뢰한 유인물 관계로 동대문경찰서 연행
박형규 목사 저서 『해방의 길목에서』 제작 중 중부경찰서 연행
1980년 ‘김재규 항소이유서’ 제작 건으로 구속, 5월 3일 서대문구치소에 수감.
1988년 인쇄문화운동협의회 초대 회장
2002년 5월 전북민주동우회 회장
췌장암 발병으로 11월 9일 영면
2005년 4월 민통련 창립 20주년 행사에서 공로상 수상

 


글 / 김기선
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 발표.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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