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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사태 이후 중국의 민주주의


중국의 민주주의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1989년 6월에 발생한 천안문사태다. 서구에서는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한 이후 경제변화가 정치변화를 촉진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예측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1980년대에 덩샤오핑 등 중국공산당 내의 개혁파들이 경제개혁과 함께 정치개혁을 주된 의제로 강조하였던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예측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천안문사태는 중국에서의 민주주의가 그처럼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천안문사태는 자유주의적 경향에 동정적 태도를 취했다는 이유로 보수파 원로들의 비판을 받고 총서기직에서 축출되었던 후야오방의 1989년 4월 사망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베이징의 대학생들은 중국공산당에게 후야오방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점차 더 적극적인 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보수파의 영향을 받은 인민일보가 이러한 학생들의 시위를 ‘반혁명 동란’이라고 규정하면서 학생들과 중국공산당이 정면충돌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타협점을 찾지 못했고, 사태의 발전을 용인할 경우 더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던 중국공산당은 6월 4일 새벽 인민해방군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고 수 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천안문사태는 좌절된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기호로 남아있다.
역설적인 것은 천안문사태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1992년 초 86세의 덩사오핑이 선전, 광저우 등 중국 남부도시를 순회하며 한 일련의 연설에서 적극적인 시장화 개혁과 대외개방을 촉구하고, 중국공산당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채택하면서 시작되었다. 1992년 이후 중국은 적어도 경제적인 영역에서는 천안문사태의 그늘에서 벗어나 다시 적극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였고, 1990년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세계의 관심은 천안문에서 중국의 시장으로 바뀌었다.



이와 동시에 정치개혁 문제는 뒷전으로 밀렸다. 중국공산당은 1980년대와는 달리 정치개혁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중국공산당의 일당지배에 기초한 정치적 안정이 경제성장의 전제조건이라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다.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1990년대 내내 경제적으로 침체에 빠졌던 상황과 비교할 때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1990년대 중국은 ‘경제의 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민주주의’는 중국과 거리가 먼 문제로 비춰졌다.

‘경제의 시대’에서 ‘정치의 시대’로

그러나 ‘경제의 시대’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경제가 고도성장을 지속하는 것과 함께 사회적 갈등도 증가하고 있다. 2005년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9.9%를 기록하였으나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집계한 항의성 집단행동의 수만도 8만 7천여 건에 달한다. 이는 2004년보다 8%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충돌의 강도도 증가하고 있다. 2005년 12월 6일에는 중국 남부 광동성에서 무장경찰이 지나치게 낮은 보상으로 토지수용이 진행되는 것에 항의하는 농민들에게 발포하여 3명이 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이는 1989년 천안문사건 이후 첫 발포사건이었다. 이미 2004년 10월 스촨성의 한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댐 건설에 따른 이주비용이 지나치게 낮게 책정된 것에 불만을 갖고 수 만 명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가장 큰 원인은 경제성장과 함께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에 있다. 농촌의 1인당 소득은 도시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다. 계층간 소득격차 정도를 보여주는 지니계수는 0.50까지 증가하여 세계에서 소득불균형이 가장 심한 남미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전체 인민들의 이익은 통일되어 있다는 사회주의적 논리가 설 자리가 좁아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의 농민, 노동자, 시민들은 점차 국가가 자신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자각이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중국공산당 일당지배체제 하에서 이런 요구들이 정책결정 과정에서 반영될 수 있는 합법적이고 제도적인 통로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농민, 노동자들은 점차 ‘불법적’ 집단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표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이에 따라 사회불안도 증가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지도부들도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나름의 대응에 나서고 있다. 2002년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된 후진타오는 집권 초기부터 당과 국가사업에서 인민의 이익을 근본에 둘 것을 강조하면서 “인민을 근본으로 삼는다(以人爲本)”라는 새로운 통치철학을 밝힌 것도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리고 작년에 발표된 11차 5개년 계획안은 “조화로운 사회(和諧社會)의 건설”이라는 구호를 제시하며 그동안 불균형 발전이 초래한 문제점을 시정하는 것을 주요한 국가목표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조화사회를 “민주법치가 확립되고, 공평정의가 실현되며, 신뢰와 우애에 기초하여 협력하고, 활력이 충만하며, 인정과 질서가 유지되고, 사람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하는 사회”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개혁개방 과정에서 소외된 계층의 권익보호에 과거보다는 더욱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도 경제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점차 정치의 시대가 막을 올리는 전환점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의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말할 것도 없이 민주주의이다.

시민사회의 등장과 중국의 민주주의

객관적으로 사회적 갈등이 증가하고 그 심각성이 권력에 의해 인정된다고 해서 민주화가 자연스럽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반면 사회갈등은 다른 어떤 국가들보다 첨예해지고 있는 중국의 상황은 권위주의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혼란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딜레마를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천안문사태가 실패로 돌아가고 이후 중국의 정치변화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도 못한 주된 이유는 중국 내에서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역량이 축적되지 않았던 것에 중요한 원인이 있다.
그런데 최근 중국에서 민주주의의 전망을 밝게 하는 새로운 변화가 발생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자발적인 NGO들이 조직되고 시민사회의 맹아가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국가에 대한 자주성과 자발성을 기초로 하는 사회관계의 발전을 추구하고 있으며 중국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안정이냐 혼란이냐라는 이분법적 접근에서 벗어나 질서 있는 변화와 민주화를 촉진할 수 있는 사회적 역량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천안문사태를 전후로 시민사회가 중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적 토대로서 관심을 모은 바 있었으나 당시 이러한 관심은 항상 중국에 시민사회가 전재하느냐라는 초보적 질문에도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지 못하는 이론적 탐색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중국 환경운동의 발전과정에서 NGO들의 성장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중국의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2004년 7월부터 쟁점으로 떠오른 누쟝(怒江) 댐 건설 반대운동이다. 누쟝은 중국 서남부 윈난(雲南)성에 위치한 강인데 서쪽으로는 티베트와 남쪽으로는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연결되는 지역이며 교통로도 거의 발달되지 않아 원시적 자연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지역이다. 2003년 7월에는 주변의 지역들과 함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그런데 2003년 8월 14일 국가발전 및 개혁위원회(發改委)가 윈난성 누쟝 주정부가 제출한 ‘누쟝중하류수력발전계획보고’를 통과시키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 보고서는 누쟝의 풍부한 수력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13곳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에 환경보호 단체들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베이징에서는 녹가원이라는 NGO의 발의로 62명의 환경보호 운동가들이 서명한 댐 건설 반대 성명서가 발표되었고 중국의 환경NGO들은 여러 국제회의에 참여하여 누쟝 보호의 필요성을 국제적으로 알렸다.
이전에도 중국에서 댐 건설은 많은 논쟁들을 불러왔다.  



그런데 과거의 논쟁이 관료들 사이의 혹은 체제 내 전문가들 사이의 논쟁에 머물렀던 것과는 달리 누쟝 댐 건설 반대운동은 환경NGO를 중심으로 하는 민간부분이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우선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에 환경보호를 목표를 하는 NGO가 출현하였는데 중국 당국도 환경이 비정치적인 영역이고 스스로도 환경보호가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이를 용인하는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주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는 NGO와 기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내부적 네트워크를 발전시켰다. 예를 들면 2000년부터 녹색사롱이라는 것을 조직하여 환경문제에 대한 정기적인 토론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누쟝 댐 건설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누쟝 댐 건설 반대운동은 활동이 진행되면서 단순한 자연보호 운동에서 권익보호 운동으로 운동의 성격이 변화한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댐 건설 반대에 대해 개발론자들은 누쟝 지역이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댐 건설 이외의 방법은 없으며 댐 건설 반대는 지역주민의 발전권을 빼앗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이에 대해 단순한 자연보호라는 논리로만 대응하기 어려웠던 환경운동은 댐 건설이 주민들의 경제적 이익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낮은 토지보상과 강제이주로 빈곤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라는 논리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댐 건설 반대운동은 자연보호 운동만이 아니라 현지 주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운동의 성격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환경운동이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보장을 요구하는 움직임과 결합되고 있는 것이다.
누쟝 댐 건설 반대운동은 2005년 2월 원자바오 국무원 총리가 “신중히 연구하고 과학적으로 결정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보고서를 반려하면서 작은 승리를 쟁취하였다. 누쟝 댐 건설 문제는 아직 최종적인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로 갈등이 계속되고 있지만 중국에서도 민간역량이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러한 민간역량의 발전이 중국에서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조건을 성숙시킬 것이다.
물론 현 시점에서 중국의 민주화에 대해 성급한 기대를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국 정치사회가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전환을 실현시킬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글·사진 제공 이남주
북경대학 정치학 박사. 현재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 계간지 『창작과비평』 상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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