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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행사

고 전태일열사 40주기 추모제

고 전태일열사 40주기 추모제
 


○ 일 시 : 2010년 11월 13일(토) 11:00


○ 장 소 :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11:00


○ 담당자 및 연락처: 박계현 011-9709-9300


○ 열사약력


- 1948년 8월 26일 경북 대구시 남산동 출생


- 1963년 대구 청옥 고등공민학교 입학 후 가정 사정으로 그만둠


- 1965년가을 평화시장 내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한 이후 한미사 재단보조, 재단사로 일하며 비참한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게됨


- 1969년 6월 평화시장 내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 조직함


- 1970년 4월~8월 서울 삼각산의 임마뉴엘 수도원 건물 신축 공사장에서 4개월 가량 잡역부로 일하며, 이 시기에 평화시장의 형제자매들 곁으로 돌아가고자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림


- 1970년 9월 바보회를 투쟁단체인 삼동친목회로 새롭게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됨


- 1970년 10월 8일 삼동회 대표들이 (주)평화시장 사무실에 찾아가 다락방 철폐, 노조결성지원 등 8개항의 요구를 제출함


- 1970년 10월 24일 근로조건 개선 시위를 기도했으나 실패


-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경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면서 분신, 밤 10시경 성모병원 영안실에서 불꽃같은 짧은 삶을 접음


- 제 10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동지는 4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동지는 16살 때부터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시다로 노동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봉제공장의 열두어 살 소녀들이 하루 열네 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손발이 마비되도록 일해도 생계마저 위협받는 청계천 여성노동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본 동지는 착취와 혹사에 대한 분노를 갖게 되었고 나아가 이를 없애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69년 6월부터 재단사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바보회 모임을 조직하고 밤이 새도록 근로기준법 조문을 뒤지며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노동운동을 시작하였다. 많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바꾸고 청원과 진정 대신 더 적극적인 투쟁방법을 계획했다. 직접 청계천 노동자들에게 설문조사를 하고 이를 토대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개선 진정서를 만들어 삼동회원과 노동자 90여 명의 서명을 받아 다시 노동청에 제출하였고, 이것이 경향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근로조건 개선 없이 업주들의 횡포와 노동부 등 정부당국의 멸시가 이어지자 동지는 삼동친목회를 소집하여 70년 10월 20일과 24일 시위를 계획하지만 실패한다. 마침내 동지는 11월 13일 청계천 노동자들 앞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의 의미를 담아 오후 1시 30분경 시장 골목에서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당겼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며 산화하였다.

 

행사 정보

화요일 2011-10-25
지도보기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11:00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전태일(당시 22세)

1948년 8월 26일 경북 대구시 남산동 출생
1963년 대구 청옥 고등공민학교 입학 후 가정 사정으로 그만둠
1964년 단신으로 상경한 어머니를 찾아 막내 동생을 업고 뒤따라 상경
1965년 가을 평화시장 내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한 이후 한미사 재단보조, 재단사로 일함
1969년 6월 평화시장 내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조직
1970년 9월 바보회를 투쟁단체인 ‘삼동친목회’로 새롭게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됨
1970년 10월 8일 삼동회 대표들이 (주)평화시장 사무실에 찾아가 다락방 철폐, 노조결성지원 등 8개항의
요구를 제
출함 1970년 10월 24일 근로조건개선 시위를 기도했으나 실패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30분경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면서 분신을 결행,
밤 10시경
성모병원에서 불꽃으로 산화

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한 노동자가 죽어갔다.

스스로 자기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당긴 스물 두살의 젊은이, 불타는 몸으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며 쓰러져서까지 절규하던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 그는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나갔지만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모든 이의 가슴에 뜨거운 감동의 이름으로 영원히 되살아오고 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모든 투쟁의 최선봉에 서서 앞길을 밝혔던 전태일 동지는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봉제공장 노동자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생활이 너무 힘들어 서울로 대구로 가족을 이끌고 이사를 다녔지만 가난은 언제나 운명처럼 따라다녔다. 무허가 판자촌에 살면서 채소행상이나 팥죽, 비빔밥 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동지는 국민학교를 그만두고 껌, 신문팔이, 구두닦이, 리어카 뒤밀이, 꽁초 줍기, 비오면 우산장사, 여름에는 하드장사 등등 어렸을 때부터 온갖 일을 다하며 번 돈으로 어머니와 세동생을 먹여 살렸다.

이렇듯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동지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고 부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함을 몸으로 깨우치며 이를 실천하려 노력하였다. 동지는 15살 때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에서 스스로 얘기하듯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보내며 배움과 우정의 기쁨을 누리지만 1년이 채 못되어 꿈같은 학교생활을 마감하고 16살 때부터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시다로 노동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루 열네시간 노동에 커피 한 잔 값인 일당 50원, 함께 일하는 열두어살 소녀들은 누렇게 뜬 얼굴에 기관지염, 안질, 빈혈, 신경통이나 위장병을 앓고 있었다. 그들은 종일토록 햇볕 한번 못보고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다니면서 잔업, 철야, 특근에 까지 시달리며 먼지 구덩이 다락방 작업장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쏟아지는 졸음을 막으려 타이밍약을 먹으며 바늘 끝으로 제살을 찍어대고 있었다.

청계천 여공들의 삶은 이렇듯 손발이 마비되도록 일해도 생계마저 위협받는 비참한 모습이었다. 이를 본 전태일 동지는 착취와 혹사에 대한 분노를 갖게 되었고 나아가 이를 없애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여공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 동지는 매일 버스값 30원으로 1원짜리 풀빵 30개를 사서 시다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평화시장에서 도봉동까지 걸어다녔고 가혹한 노동조건에 병이 깊어진 여공들이 통증을 호소하면 주머니를 다 털어 약을 사주고 그럴 형편도 안되면 일을 대신하고 달랬지만 그 어느 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았고 이런 사정에 몹시 괴로워했다. 일이 손에 익자 전태일 동지는 미싱보조, 재단 보조를 거쳐 재단사가 되었는데 그러던 어느날 한 미싱사 처녀가 재봉틀 위에 새빨간 핏덩이를 토해냈다. 급히 돈을 걷어 병원에 데려가보니 폐병 3기로 인한 각혈이었고 그 여공은 해고되고 말았다. 몹시 충격을 받은 동지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비정하고 잔인한 노동조건을 내손으로 바꾸어 보자는 굳은 결의로 1969년 6월부터 재단사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바보회’(지금은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당하고 살지만 우리도 깨우쳐서 바보로 남지 말자는 뜻을 담음)모임을 조직하고 밤이 새도록 ‘근로기준법’ 조문을 뒤지며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노동운동을 시작하였다. 먼저 청계천 일대의 노동 실태를 조사하여 이를 토대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노동청에 냈으나 돌아온 답변은 경멸과 비웃음 뿐이었다. 1970년 4월부터 낮에는 주일학교 교사로 있던 교회의 신축 공사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근기법을 공부하며 노동운동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 번민하던 동지는 8월9일 마침내 하나의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는 오랫만에 일기를 썼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와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 · · · · · · · ·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 때에 한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동지는 동료들과의 모임인 ‘바보회’를 본격적인 투쟁을 담아낼 ‘삼동 친목회’로 바꾸고 청원과 진정대신 더 적극적인 투쟁방법을 계획했다. 직접 청계천 노동자들에게 설문조사를 하고 이를 토대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개선 진정서’를 만들어 삼동회원과 노동자 90여 명의 서명을 받아 다시 노동청에 제출하고 이것이 경향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결국 근로조건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박정권과 노동청은 삼동친목회원의 주위에 경찰을 배치하며 회유, 협박에만 급급하였던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2만여 청계노동자의 단결된 투쟁뿐이었다. 동지는 삼동친목회를 소집하여 10월 20일과 24일 시위를 계획하지만 실패하자 마침내 11월 13일 청계천 노동자들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화형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방을 정리하고 아끼던 검정바바리를 깨끗이 차려입고 근로기준법 책을 품속에 넣은 채 가족들과 마지막 식사(라면)를 한 동지는 초겨울의 쌀쌀하고, 흐리던 11월13일 오후 1시30분경 시장 골목에서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당겼다.

“근로기준법 지켜라!” 어린 여공들의 비명 속에 쓰러져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다시 일어나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외치던 동지는 불에 타고 짓물러진 숯덩이가 되어 병원으로 옮겨졌다.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꼭 이루어 주십시오.”

“그래..... 걱정마라.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내가 너의 뜻을 이룰테니....”

“어머니... 배가 고파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전태일 동지는 떠나갔다.

그러나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를 강요하던 군부독재정권의 칼바람 속에서도 죽음으로 인간해방, 노동해방의 불꽃을 일으킨 동지는 70년대의 처절한 투쟁을 거쳐 이제 전국을 사르는 들불이 되어 억압과 착취가 있는 곳 어디에서나 수많은 전태일로 되살아오며 찬란한 승리를 앞당기고 있다.





동지가 남긴 글


<70년 여름에 쓴 소설 초안 속의 유서> 



내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 버린다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 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아주 영원히 버릴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어.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 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말을 들어 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못다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데, 굴리는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 반지: 金力을 뜻함. * 




<전태일 동지의 수기 中>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적이 인간이 가져야할 인간적 문제이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써의 인간적인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




<일 기 1> 



어지럽게 들려오는 쇠금속 소리. 짜증섞인 미싱사들의 언성. 무엇이 현재의 실재(實在)인지를 분간 못하면서, 그 속에서 나도 부지런히 그들과 같이 해나갔다.

무의미하게, 내가 아는 방법 그대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이외에는 무아지경이다. 아니 내가 하고 있는 일 자체도, 순서대로, 지금 이 순간에 해야 될 행동만이 질서정연하게 자동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의 나는 일의 방관자나 다름없다. 내 육신이 일을 하고,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때까지의 육감과 이 소란스런 분위기가 몇 인치, 몇 푼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 긋고 나라시가 되고, 다 되면 또 재단기계를 잡고 그은 금대로 자르는 것이다. 누가 잘랐을까? 이렇게 생각이 갈 때에는 역시 내가 잘랐다. 왜 이렇게 의욕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렴풋이 생각이 확실해질 때는 퇴근시간이 다 될 때이다.

세면을 하고 외출복으로 바꿔입고, 인사를 하고 집으로 오면 밥상이 기다리고 있다. 밥을 먹고 몇 마디 지껄이다가 드러누우면 그걸로 하루가 끝나는 거다.

1967년 3월




<일 기 2>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마석모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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