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으로 바로가기

이달의 행사

고 김낙성동지 25주기 추모제

고 김낙성동지 25주기 추모제

○ 일 시: 2019년 4월 13일(토) 11:00

○ 장 소: 금촌기독교공원묘역

행사 정보

토요일 2019-04-13
지도보기 금촌기독교공원묘역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김낙성

- 1955년 12월 3일 충북 음성 출생
- 1975년 12월 19일 용산공업고등학교 통신과 졸업
- 1991년 5월 미아전화국 창동분국에서 근무. 한국통신노조 개혁모임에 참가
- 1992년 4월 선거에서 어용지부장 제치고 서울지방본부 대의원 피선. 이후 어용노조의 부당간섭에
항의하는 농성에 적극가담. 본격적인 노동운동함. 한국통신노동조합 민주화추진위원회를 확대 강화
하는데 기여.
- 1992년 7월 서울지역 ‘노민추’ 결성
- 1993년 3월 조합집행부의 징계기도에 맞서 저지 투쟁 전개
- 1993년 11월 ‘전국노민추’ 결성
- 1993년 12월 복지후퇴 및 직선제사수 투쟁위원회 결성
- 1994년 4월 17일 백혈병으로 운명

동지는 미아전화국 창동분국 시절 기독교 ‘신우회’ 활동 등을 통한 성실함으로 조합원들의 두터운 신
임을 받고 ’91년 4월의 대의원 선거에서 어용지부장을 제치고 선출되었다.

’91년 11월 11일 데이콤과의 국제전화 경쟁체제 도입에 따른 체신부의 부당간섭에 항의하던 22명의
동지들을 해고 등 중징계하는 등 민주노조의 싹을 아예 없애려 기도하였다. 또한 창동 반장이던 박문
형 동지도 해고를 당하자 동지는 농성에 적극 가담하면서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하게 되었다. 동지는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동지들을 뒷받침하며 궂은 일을 도맡아 했고, 의지가
부족하여 뒤로 쳐지는 동지가 있으면 며칠 밤을 대화해서라도 동지를 다시 투쟁의 대열에 끌어올리
곤 하였는데 ‘94년 4월 17일 백혈병으로 운명하고 말았다.

김낙성 동지는 미아전화국 창동분국 시절 기독교 신우회 활동 등을 통한 성실함으로 조합원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91년 4월의 대의원 선거에서 어용지부장을 제치고 선출되었다. 동지는 자신을 택해준 조합원들에게 실망을 주지않기 위해 열심히 활동을 해나갔다. 동지는 이후 91년에 어용노조의 부당간섭에 항의하는 등 농성에 적극가담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하게 되었다.

동지는 어려울 때 노동조합 민주화추진위원회를 확대, 강화하여 투쟁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일으켜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93, 94년에는 노동조합을 해산하고 여용산별 노조를 만들려는 공작을 펴는가 하면, 위원장, 지부장 임기를 3년 연장하는 등의 한국통신 노사 양측의 반민주적 음모에 맞서 모든 정신과 육체를 민주노조 사수에 바친것이다.



동지가 남긴 글


<동지의 글>

Ⅰ.

이 세상에는 많은 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하나입니다.

표준 시각이 있습니다.

그곳에 맞추어야 합니다.

내 시계가 표준이 아닙니다.

당신의 시계가

우리 나라 같으면 중앙관상대에서 들려주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곳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 나라 시간이 기준이 아닙니다.

일본도 미국도 아닙니다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시각을 맞춥니다.

누구나 그곳에 맞추어야 합니다.

오리엔트건, 오메가건, 브로바 건……

싼 것에서 금·은·보석 비싼데 이르기까지

모든 시계는 시간을

정확히 맞추어야 합니다
.
여행하는 사람이 시간을 정확하게 맞춰놓기

않으면 차를 놓치고 말것입니다.

당신의 시계는 지금 몇시입니까?

우리는 늘 자신의 시계를 중심으로 모두를

맞추려 합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순례자입니다.

나그네일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의 노정을 일생을 아니 만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을 읽으십시다.

그 시보를 들으십시다.

사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잠깐 멈추고 주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예로 우리는 마르다와 같이 분주합니다.

잠깐 손을 멈추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봅시다.

때로 우리의 발걸음은 매우 바쁘기도 하고 매우

태평하기도 합니다.

이제 잠깐 발을 멈추고

지나온 발자국이 누구의 것인가 돌이켜 봅시다.

그리고 주께서 나와 서 계심을 확인합시다.

내가 말하고 있을 때 묵묵히 듣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내가 분주할 때 마칠 때까지 기다립시다.



Ⅱ.

신앙이란 무엇인가?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제적이지 않는가?

내가 무엇인가? 그리 대단치도 않은 내가

허황되이 자신을 망각한 채.......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남을 구원한다고?

전도사여 먼저 자신을 구원하라 남을 돕기전에

먼저 자신을 도우라. 참으로 불쌍한 사람을

찾으려 하는가. 나의 부모, 누나, 동생들……


물론 「나의」라는 소유격이 계속 붙어도 문제이겠지.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환경. 또 나의 모습 이것은 변명할 수 없으며, 잊으려 하지 말라. 나는 잊을지 모르지만. 세상과 환경은 나를 알지 않는가? 저의 가난하고 연약한 모습 형편을 아시도다. 참으로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인도하소서.



동지를 생각하며


김낙성 동지는 우리가 생각하듯 투쟁적이거나 과격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조용하고 선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주장만을 앞세우기보다는 상대방의 주장을 진지하게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후 자신의 견해를 얘기하곤 했는데 불의에 대해서는 단호하면서도 강렬하게 주장을 했다.

동지는 한가정의 가장으로서 존경받았고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는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러한 동지가 어떻게 노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을까.

미아전화국 창동분국 시절 기독교 신우회 활동 등을 통한 성실함으로 조합원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김낙성 동지는 91년 4월의 대의원선거에서 어용지부장을 제치고 선출되었다. 동지는 자신을 택해준 조합원들에게 실망을 주지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활동을 해나갔다. 그러던 중 당시 창동반장이었던 박문형동지를 통해 민주개혁그룹을 알게 되었다.

동지는 민주개혁그룹과의 첫 만남에서 ‘불온한 단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한달 후 서울지방본부위원장 선거에 찾아오게 된 그는 밤새 진지한 토론을 벌이는 동지들의 모습속에서 민주개혁그룹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되었다.

91년 봄 한국통신은 사용자와 노조가 합작하여 노동조합 민주화 투쟁에 대한 탄압이 노골화되던 때였다. 82년 노조가 창립된 이래 한국통신노동조합은 조합원위에 군림하여 노동조합을 자신의 출세 도구로 이용해왔던 소수 어용세력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들은 사측과 결탁하여 91년 11월 11일 데이콤과의 국제전화 경쟁체제 도입에 따른 체신부의 부당간섭에 항의하던 22명의 동지들을 해고 등 중징계하는 등 민주노조의 싹을 아예 없애려 기도하였다.

또한 창동반장이던 박문형동지도 해고를 당하자 김낙성 동지는 농성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하게 되었다.

동지는 어려울 때 노동조합 민주화추진위원회를 확대 강화하여 투쟁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일으켜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93,4년에는 노동조합을 해산하고 어용산별 노조를 만들려는 공작을 펴는가 하면, 위원장, 지부장 임기를 3년 연장하는 등 한국통신 노사 양측의 반민주적 음모에 맞서 모든 정신과 육체를 민주노조 사수에 바친 것이다.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날도 부모님 걱정하신다고 집에 알리지 않고 상을 당한 동료집에 가서 함께 밤을 새우며 위로하는 등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했다.

동지는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동지들을 뒷받침하며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의지가 부족하여 뒤로 쳐지는 동지가 있으면 며칠밤을 대화해서라도 동지를 다시 투쟁의 대열에 끌어올리곤 했다.

“김낙성 동지를 한마디로 집약하여 표현하자면 어떤 것이 좋을까”라는 질문에 같이 활동했던 동지가 스스럼없이 “헌신적인 자세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김낙성 동지는 헌신이 무엇인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진정한 노동운동가였다.



추모글

잊지 못할 동지 김낙성


91년도 내가 미아전화국 지부 창동분국 반장시절 김낙성 동지는 신우회 회장으로 분회 임원으로 나와 같이 노동조합 활동을 같이하였다. 나와 동지는 늘 신앙에 대한 토의로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내가 데이콤과 국제요금 저지 투쟁으로 해고와 징계 전출을 당하여 창동전화국을 떠나게 되었을 때 나는 그를 창동 반장 후임으로 내정했다. 징계당한 동료들이 반대했다. 그 이유는 너무 온건적이란 이유에서다. 그러나 나는 적임자는 김낙성동지 외에는 없다고 주장하여 그를 후임자로 정했다.

당시 김동지는 민주노조에 대한 적극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관심은 갖고 있었다. 어용 및 사측은 민주노조를 과격, 파괴, 폭력, 문제가 많은 집단으로 매도하여 악선전 하고 있어서 선입견이 별로 좋지 않았고, 민주노조 활동하는 동지들 모두가 해고징계를 당한 상태라 분위기 자체가 좋지 않았다. 그런 상황속에서 김동지의 고등학교 동기인 안윤선동지를 통해 설득을 부탁하였고 그의 끊임없는 노력에 김동지는 노민추 활동에 발을 딛게 되었다.

김동지에게 나는 늘 죄스럽게 생각을 한다. 작은 체구에 안경속으로 빛나는 눈빛으로 그는 지방으로 전출된 나의 처지를 돌봐 애를 써주려고 했다. 그의 마음에는 나로부터 짐을 떠맡겨진 마음이였으리라 생각한다.(나의 자리에 앉은 것으로)

그러던 중 창동전화국이 개국되어 초대지부장에 당선된후 단식농성투쟁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사측의 통제로 지부사무실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창문을 통하여 그와 이야기를 했지만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자신은 5일간 단식한 상태의 몸이었지만 구미에서 올라온 나를 오히려 내려 가려면 힘들겠다고 염려했다.

94년도 직선제 사수 투쟁(전국대의원대회 3월 말경 지리산)으로 정신없이 조직을 하고 다닐 때 김동지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장현일 동지가 외로운 투병 생활에 작으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서 박동지가 한 번 올라와서 위로 해주시기 바란다는 전화를 받았다. 늘 마음속에 있었지만 올라오지 못하고 임종하기 몇시간 전에야 그의 문병을 왔다. 무균실에 누워있는 그의 면회는 사절되었고 토요일 오후 다시 구미로 갔다.

그 다음날 임종 소식을 전해 들었다. 39세의 일기로 오로지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했고, 대중의 뜻을 쫓아 노동운동에 앞장섰고, 타의 불행을 본인의 아픔으로 느끼는 동지였다. 혈우병으로 병상에 누운 직원 자제가 있었다. 가정도 어렵고 힘들어 하는 모습을 안스럽게 생각한 동지는 솔선해서 불우이웃돕기로서 창동, 상계, 미아전화국에서 신우회가 주축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제는 그가 열망하던 노동조합이 민주화 된지 어언 2년, 그의 크나큰 희생정신을 생각해본다. 경기도 탄현에 그의 모습을 묻고 돌아오던 부산행 열차 안에서 마지막 그의 모습을 그리며 눈시울을 적셨다. 지난 시절 대전 노민추 모임에서 결의에 찬 모습으로 민주당 당사 농성을 주장하던 그의 모습이 그와의 생전 마지막으로 기억이 될 줄이야.

금촌 기독교공원묘지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