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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정보

황보영국-당시 26세

황보영국-당시 26세

황보영국(당시 26세)

1961년 9월 16일 부산 출생
1979년 성지공고 중퇴
울산 현대중공업, 부산 삼화고무, 태화고무 근무
1987년 3월 3일 박종철 동지 49제에 참가. 연행되어 일주일간 구류
1987년 5월 17일 부산 상고앞에서 분신, 「독재타도」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호헌책동 저지하고.
민주헌법 쟁취하자」를 외치며 달리다 쓰러짐
1987년 5월 25일 운명
황보영국 동지는 1961년 9월16일 부산시 부산진구 당감동에서 출생하였고, 부산 성지공업 고등학교를 중퇴하였다.

방위병 근무를 마치고 울산 현대 중공업, 부산 삼화고무, 태화고무, 우성사 등에서 연강판전기 용접, 중장비 운전 등의 기술을 익히면서 노동자로 생활하던 동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하였다.

26세 되던 해인 1987년 5월17일 오후 4시47분경. 광주항쟁 7주기를 맞이하여 거사를 결심한 황보영국 동지는 부산시 서면 부산상고 앞에서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인 후 “독재 타도”,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호헌책동 저지하고 민주헌법 쟁취하자”를 계속 외치면서 100여m를 달리다 귀거래 식당 앞길에서 쓰러졌다.

황보영국 동지는 쓰러지면서 “하나님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절규하며 혼절했고 그 후 경찰에 의해 백병원으로 옮겨져 치료하다 일주일만에 끝내 운명하였다.



동지를 생각하며

<황보영국 동지의 분신 후, 모친께서 자식을 잃은 슬픔을 가누며 지난날을 회상해 쓴 글을 동생 황보영찬씨가 옮겨 적은 글>

1987년 음력 정월 00일에, 박종철 추모제를 지낸다는 소식 듣고, 충무동 거리에서 식 올릴적에 무더기로 잡혀 들어가다가 4일밤 자고, 그 속에서 신민당 국회의원 변호사도 오고 투쟁하는 것을 보고, 또 임신 8개월된 아줌마가 와서 남편이 징역가니 이놈들아 나도 집어넣으라고 외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몇번을 되풀이하고 또 순경들이 사진 4장 찍어 부친 것을 보고 이건 완전독재다 하고, 죄없는 사람 징역가는 것을 보고 몇사람 투신자살하면 갇힌 사람 다 나온다고 해 내가 피를 뿌리고, 천당가면 죽는게 아니고 영영 사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엄마는 내가 피를 막 뿌리고 하늘 나라로 가면 그 돈 다 어데 쓸라고...말해봐라. 엄마 나는 민중에 가입했다 하고, 서울 갈라고 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내가 서울가면 언제올지 모르니까 형님 생신이나 갔다와야지.. 회사에서 2만원 가불해서 갔다와...



추모글


온몸으로 피워올린 노동자의 불꽃 (6월항쟁 항쟁일지(부산지역 유월항쟁 자료발간위원회)중 발췌)

4.13 호헌조치 이후 부산에서는 호헌 반대열기가 고조되었다. 부민협은 기관지 ‘민주시민’과 시국선언물 유인물 소식지를 통해 4.13 호헌조치의 부당함을 알렸고 대학내에서 학민투를 성공리에 마친 대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시민들을 상대로 ‘독재타도’와 ‘호헌철폐’를 선전선동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민주화 운동은 박종철 열사 추도식과 박종철열사 49제에 경적을 울리며 참여한 운수노동자들을 제외하면 주로 재야인사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펼쳐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5.17 젊은 노동자의 분신이 부산의 민주화운동에 충격을 던진다. 이날 오후 4시20분경 서면 부산상고 앞 복개천 도로에서 노동자 황보영국씨가 ‘독재타도’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호헌책동 저지하고 민주헌법 쟁취하자”를 외치다 서면시장 부근 도로에서 쓰러져 “하나님, 이 나라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절규했다.

그러자 주위에 멍청히 서있던 전경들이 뛰어와 에워싸고 그대로 내버려두려 했으나 주변 식당의 아주머니들이 소방호스를 들고 나와 옷을 덮고 물을 끼얹어 불을 끈 후, 119 긴급구조치로 백병원으로 이송하여 중환자실로 옮겼다.

황보영국씨는 811호 중환자실로 옮겨져 의식불명인 상태에서도 붕대로 칭칭 감긴 손을 꿈틀거리며 ‘독재타도’를 신음처럼 외쳐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한편 경찰은 황보영국씨의 병실 앞에 사복형사를 배치, 병원측과 합세하여 면회사절이라 걸어놓고 아예 병실 앞에 죽치고 앉아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신부, 변호사, 재야인사 등의 외부인 통제를 간섭하면서 단 몇 초 동안의 면회시간을 주는 등 분신을 은폐하기 위하여 혈안이 된 모습이었다. 경찰의 협박과 회유로 가족들은 개인적인 문제다, 영국이는 친구가 없다, 주민등록증을 보여달라, 경찰들이 수고를 많이 한다 등으로 자식의 분신원인을 밝히려 하기는 커녕 끝까지 함구, 찾아간 사람들을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다. 거의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황보영국씨는 쥐어짜듯 신음처럼 ‘독재타도’를 외치며 홀로 몸부림치다 25일 새벽 5시 숨을 거두었다. 이날 정오에 화장을 하였다는 소식에 놀란 민가협 어머니들과 인권위, ‘민주시민’ 실무자 등이 당감동 집을 방문하여 조의금을 전달하며 애도의 뜻을 표하고, 화장하기까지의 사정을 물었으나 묵묵부답 침묵으로 일관, 의구심이 일었으나 설마 자식의 일인데 숨기랴하며 돌아왔으나 다음날인 26일 오전 9시에 당감동 화장터에서 화장한 것으로 밝혀져 경찰의 회유로 시신마저 은폐하려는 행위는 민주시민을 분노하게 하였다.

황보영국씨의 가족이 자식의 죽음을 감추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경황이 없는 가족들에게 가한 경찰의 잔악한 협박과 회유때문이었다. 얼마나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면 자식의 화장조차도 숨기려 했을까. 훗날 민가협 아버지로 열렬한 민주투사가 된 박종철의 부친 박정기씨도 처음에는 경찰의 협박에 주눅이 들어 기자들앞에서 “내 아들이 못돼서 죽었소”라고 말했다. 황보영국씨의 분신소식이 만 하루가 지나고 난 다음에야 겨우 알려졌고 그 전에 먼저 경찰들이 손을 쓴게 아쉬웠다.

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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