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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정보

문송면-당시 15세

문송면-당시 15세

문송면(당시 15세)

1973년 충남 서산 출생
1987년 12월 5일 야간공고 진학을 위해 영등포 협성계공(주)에 입사
1988년 2월 8일 휴직계 제출
1988년 3월 14일 네 군데의 병원을 전전하고서야 수은 및 유기용제 중독 진단을 진단받음
1988년 4월 7일 노동부 서울 남부지방사무소에 산재요양신청서 제출. 노동부, 산재요양신청서 처리지연
1988년 6월 29일 여의도 성모병원 직업병과로 전원함. 점차악화
1988년 7월 2일 운명
87년 12월 영등포 소재 협성계공에 입사한 문송면 동지는 놀랍게도 불과 2개월만에 수은중독증상을 보여 6개월의 투병 끝에 사망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고향 충남 서산에서 상경한 문동지는 야간고등학교를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이 회사에 들어와 압력계 커버의 신나세척, 페인트칠, 온도계의 수은주입작업을 해왔다. 이러한 작업과정에서 수은이 새어나와 작업장의 공기가 수은증기로 온통 뿌옇고 바닥에도 액체가 된 수은이 널려있는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노동부는 형식적인 개선명령만 내려놓고 어떠한 실질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작업중에도 불면증, 두통, 허리와 다리의 통증 등의 증세가 나타났으나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전신발작으로 악화된 후 4군데의 병·의원을 전전하고서야 서울대병원에서 수은 및 유기용제 중독 진단을 받았다. 이 진단에 따라 가족들은 4월7일 노동부에 산재요양신청서를 냈으나 회사의 방해에 놀아난 노동부는 10일만에 산재요양신청서를 반려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이 일이 신문을 통해 알려지자 6월말에야 요양승인이 나왔지만 산재지정병원으로 옮긴지 이틀만에 문송면 동지는 운명하고 말았다. 당시 동지의 나이는 만 열다섯살이었다.

 

동지를 생각하며

회사는 몸이 안좋던 석달동안 산재처리를 하지 않았고, 노동부는 산재처리 신청을 기각했다. 회사와 노동부가 그를 죽이고, 가난한 조국이 그를 죽이고, 부르조아 매판정권의 악덕자본가가 그를 죽이고, 신식민지 교육제도가 그를 죽이고, 얄팍한 중산층 가정 행복이 그를 죽이고, 미제 침략의 음란광포한 대중문화가 그를 죽이고, 도시와 농촌의 불평등이 그를 죽이고, 우리의 무관심이 그를 죽였다. 이 썩은 세상 어른들의 모든 죄악이 그를 죽였건만, 그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어린 나이에, 어른들을 탓하지 않고 슬픔도 죽음도 모르는 채 다만 순결한 육체가 스스로 더렵혀져 자신을 더럽힌 이 세상의 모든 추악함을 증거하고, 끝내 천진난만한 채 갔다. 슬퍼 말라. 그는 죽음을 모르나니, 산 자의 온갖 슬픔의 무게도 그의 어깨를 억누르지 못하나니, 죽음의 자본가 예속세상이 삶의 노동자 해방 세상으로 슬픔의 미제 식민지가 기쁨의 자주통일 조국으로, 참혹한 노예의 전쟁이 환희로운 생산주체의 평화로 변혁되는 날 그는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당당한 노동자도, 힘차고 아름다운 노동자로.

 

<성명서 - 1988.7.9. 건강사회실현 약사협의회 성명서 中>

문송면군은 찢어지는 가난의 서러움을 벗어던지고, 일하면서 야간고등학교를 다니겠다며 87년 12월 협성계공에 입사했다. 그러나 15세 어린소년의 소박하고 작은 꿈은 어디로 가고 ‘수은 중독’이라는 직업병으로 인해 우리의 형제 문송면군은 싸늘한 시신으로 우리의 품에 돌아왔습니다. 수은과 신나속에서 온도계 및 압력계를 만들기 위해 11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고, 국소배기시설이나 환기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살인적인 작업환경에서 불과 2개월 만에 건강했던 문송면군의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고 6개월간의 투병 생활로 신음하다 처절히 죽어갔습니다. 이같이 나이어린 소년이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그토록 짧은 기간에 죽음에 이르고 말았는데도 이에 대한 관계자의 처사는 우리에게 더욱더 참담한 심정을 갖게 합니다. 가족들의 애끊는 호소도 무시한채 산재처리를 방해하고, 연소 근로자의 유해 위험 증금속 작업배치 등 위법 사실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정당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료주의의 속성 그대로 안일한 책임회피와 은폐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는 3월 14일 서울대병원에서 수은중독 및 유기용제중독이라는 진단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카드뮴 중독으로 처절하게 죽어간 고상국씨를 고혈압에 의한 사망으로 조작 발표했던 것과 너무도 똑같이 반복된 기만과 직무유기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또한 사업주의 안전시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작업환경 개선만으로도 노동자의 건강한 생명에 직결되는 많은 산재 및 직업병을 방지할 수 있음에도 이를 방기한 채, 결국에는 연소자의 생명마저도 빼앗아 자신의 기름진 배를 채우겠다는 비인간적이고, 탐욕스런 욕망을 드러내고야 만 것입니다. 오늘도 이 땅에서는, 기업주의 안전에 대한 인식부족, 장시간 노동과 작업강도의 강화 등으로 노동자의 과로 그리고 안전교육, 행정감독 등의 미비, 산재 방지를 위한 대책의 결여, 수출지향적 파행구조의 희생물로 매일 5명의 근로자가 숨져가고 있으며 약 3일에 2명꼴로 직업병 유소견자가 새로 생겨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또한 의료가 건강한 삶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켜주기 보다는 상품화되어 초대한 이윤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따라서 거의 모든 병원에서 산재환자는 천대와 멸시를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정부는 생산의 주체이며 이 사회의 원동력인 근로자들의 건강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산업재해, 직업병 전문의료기관의 설치와 활성화를 비롯 항구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문송면군과 같이 병원을 전전하면서 죽어가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천만 노동자의 투쟁과 우리 사회 모두의 지속적인 관심만이 이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노동자의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을 갖고 보건의료 전문인으로서 우리는 천만 노동자의 안전하고, 무해한 작업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건강사회 실현의 초석임을 인식하고 문송면군의 죽음을 우리사회 모두가 반성하는 계기로 삼고 살인적 노동조건 개선을 촉구합니다.

 

 

백일장 수상작품

차상

박수정(주 방림방적)

정(情)

먹장하늘은 온 세상을 뒤덮고<BR>검푸른 회오리 몰아칠 때<BR>어린 한 생명 소리없이 떨고 있었네. <BR>태양을 저주하며<BR>낙엽빛으로 퇴색한<BR>여린 생명의 잎사귀가 <BR>쥐어 뜯긴 가슴에<BR>피멍을 새기는 까닭은 무엇일까?

열 다섯!<BR>열 다섯 청춘은 가늘게 흩어지고<BR>마지막이란 말을 남기기엔<BR>눈부신 무수한 날들이 말없이 기다리고<BR>있었다.<BR>운명이 빚은<BR>애달픈 사연은<BR>쓰디쓴 현실로 이어지고<BR>애초부터 헤어짐이 약속된 인연을 <BR>가슴 풀어 헤치며<BR>이토록 연연해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노을을 흔적으로<BR>남기는 믿음......<BR>홀씨로 날리는 민들레의 간절한 바램은<BR>소생!<BR>낭랑히 울려 퍼지는 <BR>윤회설을 깊이 간직하고픈 이들의 <BR>파헤친 가슴 사이로<BR>이끼 낀 샘물이 곱게 흐르는 까닭은<BR>무엇일까?

* 열다섯 어린나이에 국내최초 직업병 <수은중독>으로 아리따운 청춘 아프게 접어야 했던 우리의 동료 문송면군의 영혼을 위로하면서......

 

 

 

 

<7월, 그리고 아, 우리의 문송면 군>

하종강의 노동과 꿈(2002.7.6)

<BR>청계천 평화시장 한 복판에서 자신의 온 몸을 스스로 불사르고 숨져 간 우리의 훌륭한 선배가 있었습니다. 벌써 30년도 더 지난 옛일이 되었으나, 그 이름을 모르는 노동자는 없습니다. 아, 전태일... 그가 온 몸에 불이 붙은 채 쓰러졌다 일어나고, 쓰러지면 또 다시 일어나, 뜨거운 연기를 들이마시며 마지막까지 외쳤던 구호가 무엇이었는지 잠시 생각해 봅시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그 후로, 수 많은 우리의 동지, 선배들이 분신 또는 투신으로 숨져갔습니다. 김경숙, 김종태, 박종만, 홍기일, 박영진, 표정두, 이석규, 김장수, 오범근, 최윤범, 성완희, 송철순, 김윤기, 김종수, 강현중, 김종하... 우리들 가슴에 눈물과 함께 묻은 이름들은 미처 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런데... 전태일 열사의 사망 이후 숨져간 그 많은 노동자들이 외친 구호들 중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따위의 유치한 구호는 없었습니다. 오해 마시기를... 우리는 지금 전태일 선배의 마지막 구호가 유치했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근로기준법은 노동자가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져야 할 최저의 기준입니다. 그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 시대 우리 선배 노동자들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는 처절한 구호로부터 출발한 것이 70년대의 민주노동운동이었고, 그 토대 위에서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87년 7, 8월의 노동자 대투쟁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문송면 군의 이야기를 하면서,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왜 길게 늘어 놓는가라고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눈치 빠른 사람은 이미 알아챘을 것입니다.

노동자 건강에 관한 한, 산업재해 추방 운동에 관한 한 그때가 바로 그 수준이었습니다. 1988년 7월, 문송면이라는 어린 소년이 입사한 지 두달만에 수은에 중독되어 몇개월 동안 병상에서 신음하다가 결국 15년의 한맺힌 삶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의 억장이 무너져 내렸을 때, 그때가 비로서 산재 추방 운동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날, 문송면 군에 관한 집회를 준비하다가... 송면이가 죽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울며 불며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달려가던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산재추방운동의 현장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 노동운동단체, 보건의료단체, 재야사회단체, 종교단체 등 37개 단체들로 조직되었던 `고 문송면 산업재해 노동자장 장례위원회`에 몸 담았던 사람들... 문송면 군의 죽음을 이 땅의 처참한 노동현실을 폭로하는 비극으로 규정하고,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철저한 보상, 산업재해 노동자장 거행, 산재 추방 대책사업 촉구 등의 활동을 벌여 나갔던 사람들은 아직도 산재 추방 운동의 현장에서 종종 만날 수 있습니다.

"송면이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다짐과 "이러한 일이 터지도록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더 많은 사람들의 후회가 결국 오늘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산재추방운동의 대열에 자신의 몸을 던지도록 하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해마다 7월을 산업재해 추방운동의 달로 정하고 많은 공동사업을 통해 집중적으로 산업재해와 직업병에 관한 행사를 해오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문송면은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전태일입니다. 그는 지금도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나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마라!"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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