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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정보

이재호-당시 25세

이재호-당시 25세

이재호(당시 25세)

1964년 5월 전북 부안 출생
부안국민학교 졸업
부안중학교 졸업
중학교 졸업 후 가정을 돕기 위해 서울로 상경, 표구제작 계통의 회사에서 노동자 생활을 시작
1988년 1월 협신사 입사
1989년 10월 29일 노조재건 활동 중 피살
지난 89년 10월29일 0시40분경 인천 주안 4동에서 노조관련 상담을 마치고 귀가하던 협신사(액자제조업체, 사장 이희천) 노조원 이재호 동지가 둔기에 턱을 맞고 숨진채 발견되었다. 이에 경찰은 단순히 다투다 사망한 폭행치사 사건으로 종결코자 하였으나, 이재호 동지가 그간 회사측에 의해 파기된 노조를 재건하기 위해 열성적으로 일해오다 끊임없는 노조탄압의 협박속에서 많은 의문점을 남긴채 사망함으로써 동료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슬픔과 애통함 속에서도 경찰에 정확한 사인규명을 요구하였다.

당시 나온 경위서를 통해 좀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장 이희천은 군 인사계 상사로 예편한 뒤, 동생이 설립 운영하던 이 회사를 강탈(쇠사슬로 묶고, 폭행하여 동생이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고 함) 80여명의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이 정한 최소한의 규정조차 지키지 않은 채 가혹한 노동을 강요하였다. (유급휴일은 3.1절, 광복절 이틀 뿐이며 상여금 200%에 생리 월차휴가도 전무하고, 작업복 조차 지급 안함) 이에 항의라도 할라치면 사장이 고용한 폭력배에 가까운 관리자들이 서슴없이 폭력으로 응답하는 실정에 참다못한 노동자들이 89년 2월 27일 마침내 노조를 결성, 협상을 요구하였으나 온갖 폭력을 동원해 노조탄압을 일삼고 협상에는 응하지 않았다.

사장이 직접 농성장에 들어와 폭행·감금·감시하고, 윗도리를 걷어 허리에 찬 가스총을 보여주며 “내가 이런 사람이다. 집에도 가스총이 더 있다. 네까짓 것들 한놈 죽어도 까딱없다. 내가 민정당 부위원장이다.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아느냐”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머리에 겨누기까지 하는가 하면, 제2공장 사장 장유환은 노조 사무장을 폭행해 3주간 입원치료케 한일도 있었다. 이러한 상상을 초월한 폭력과 반인륜적 행위로 마침내 노조간부들을 강제 사직, 부당 해고 시킴으로써 노조를 실질적으로 파괴하기에 이르렀으나 이재호 동지를 비롯한 협신 노동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7월에 접어들면서 다시 노조 재건의 기치를 치켜들었고, 회사측은 다시 탄압의 고삐를 조여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재호 동지 등 노조재건 위원들은 주안 노동사목인 ‘내일을 위한 집’에서 근로기준법 적용문제와 노조 재건방안 상담을 하며 조언을 받아왔고, 피살 전날인 10월 28일(토)에도 6시경부터 상담을 하기로 하였다. 노조 재건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워온 회사측은 이날 화장실에서 최창옥 생산부장이 이재호 동지에게 “같이 살고 있는 임영순, 김도형(노조재건 중심인물들임)이 따로 이사 나간다는데 이사했느냐”고 ‘관심’을 표시했다고 하며, 이날 밤 9시 동료조합원 5명과 함께 상담을 끝내고, 술을 마시러 가기 전에 이재호 동지가 동료의 전화번호를 알기 위해 회사로 전화를 했다가 그때까지도 회사에 남아있던 최부장과 통화를 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밝혀진 사실로는 함께 술을 마신 사람 이외에 그와 통화, 대화한 사람은 최부장이 마지막임)

함께 상담온 동료 6명과 ‘내일을 위한 집’ 간사 1명이 함께 주안역 뒤 술집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중 12시 정각 경에 이재호 동지가 아무 이야기없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갔고(평소 이재호동지의 주량(소주3병)으로 볼 때, 소주 한병 정도로 취할 정도가 결코 아니었으므로 동료들은 화장실에 가는 줄 알았음) 다음날 새벽 3시30분경 이재호 동지와 같이 자취하며, 함께 술을 마시다 늦게 들어온 김도영, 임영순 동지 자취방에 경찰이 회사 관리자와 함께 찾아와 사건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재호 동지의 피살 이후 경찰은 다른 가능성은 배제한 채 회사 동료들만 불러다 요식적인 수사를 진행하였다. 분명한 목격자가 있는데도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전단 제작시 범인의 복장, 체격, 도주로를 전혀 밝히지 않았고,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인근불량배와 시비끝에 피살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추정하였으며(5m 떨어져 있던 목격자나 인근 음식점, 공업사에서는 싸움, 저항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고 함) 가족들에게 피살경위를 설명치 않고 술먹고 죽었다고 하며 사체를 화장토록 유도했고, 10월30일에는 전단 작성을 위해서라고 하면서 이재호 동지가 입고 있던 피묻은 잠바를 세탁해 버렸다(혈흔, 지문, 시비의 흔적, 피살시 가격 방향 등을 알아낼 수 있는 유력한 증거물임에도)이는 범죄수사의 상식 조차 무시한 잘못으로서 적어도 경찰이 사건을 우발적인 것으로 처리해 버리려는 선입관과 예단을 가지고, 노조탄압과 무관하다는 쪽으로 처리하려는 것으로 의심치 않을 수 없다.

한편 회사측은 사건후 당황하고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바, 상식적으로 피살과 무관할 경우 종업원의 사망시 조의금도 내지 않고 회사측과의 무관함만 강조한 것은 회사측의 관련성을 역설적으로 웅변하는 것에 다름아니며 뿐만 아니라 고인과 함께 노조재건을 추진했던 조합원들에게 작업을 시키지 않고 사표를 유도하였다. 또 한가지 고인의 신원확인의 단서는 당시 입고있던 T셔츠의 흘려쓴 한글자‘협’자 위에 한자 ‘信’자로 쓰여진 것뿐이며 이것을 ‘협신’으로 해독하기가 쉽지 않고 협신사는 114로 전화번호 문의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두어시간도 걸리지 않아 회사측 관리자가 관할 파출소에 나타났다는 것은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이재호 동지는 면식범이나 계획적인 피살(살해는 목적치 않았더라도 혼내려는)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2월 노조결성 이후 계속되어 온 무자비한 노조탄압, 그리고 본격적인 노조재건 움직임과 관련된 것임이 명백하고, 특히 공안정국 아래서 자행되어온 정부기관의 불법적 연행과 테러, 구속, 수배, 미행 등과 긴밀히 연관되는 것으로 인권유린이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우리 사회의 무법 천지성을 반증하는 사건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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