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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정보

김현욱-당시 21세

김현욱-당시 21세

김현욱(당시 21세)

1966년 3월 20일 인천에서 출생
1985년 운봉고등학교 졸업, 진흥요업 근무
1986년 해군 방위병으로 입대
1987년 6월 민주화 대투쟁 적극 참여
1987년 8월 1일 사랑방교회 노동자들과 함께 인천지역 노동자 여름수련회 참여. 물에 빠진 동료를 구하고 운명
김현욱 동지는 1966년 인천의 문학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위로는 두 분 형님과 아래로 남동생을 둔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나 넉넉치 않은 집안형편이지만 때로는 짓궂게 때로는 얌전하게 티없이 자라왔다. 성장과정중 내성적인 성격을 많이 갖고 있었으나 항상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즐겁게 어울려 다녔다. 남들처럼 잘하는 공부도 아니었고 특별히 뛰어난 것은 없었으나 공차기나 뜀박질 등 사내다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열심히 그리고 잘 해내었다.

생활은 항상 성실하고 근면하여 개근상장은 빼놓은 적이 없었고 남달리 “의리”에 충실한 삶을 키워나갔다. 중학교 졸업 후 운봉공고에 입학한 동지는 이 사회의 문제들을 어렴풋이 깨달아 갈 수 있었다.

운봉공고 시절은 군대식 생활속에서 재단의 횡포속, 선생님들은 공납금 수금에만 신경쓰는 등의 이유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해 학생들은 꿈과 희망이 사라지고 오직 졸업장에만 급급하였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현욱 동지는 대학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공부를 하려 했지만 도저히 그럴 능력도 생활형편도 되지 않아 공부를 포기하고 진흥요업에 취직을 하였다. 막상 취직을 하고 보니 공장에서의 생활은 고등학교의 생활보다 더 비참한 것이었다.

지긋지긋한 노동조건과 기계같은 생활의 반복 속에서 동지는 큰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즉 이것은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을 해야 될 것인가의 고민이었다. 뼈빠지게 일을 해도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고민들을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과정속에서 친구들도 똑같이 느끼는 것을 알고부터 더욱 더 무엇인가를 찾게 되고 서로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86년 가톨릭 노동사목회에서 주최하는 자기발견 교육에 참가하여 드디어 동지가 고민하던 것들이 해결되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알게 되고 또 우리는 이러한 참담한 현실을 올바르게 해결해 나아가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김현욱 동지 자신이 노동자가 된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잘못된 사회를 뒤집어 엎고 노동자가 주인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동운동에 참가하게 되면서부터 이 일들이 진정한 노동자의 삶이라는 것을 체득함으로써 동지는 노동자로서 죽을 때까지 노력할 것을 다짐하게 되었다.

3,350원의 저임금과 장기간 노동, 쉼없이 잔소리, 욕설로 대접해 오는 진흥요업 현장에서의 노동생활은 동지의 자기발전을 쉼없게 만들었다. 늘상 자신의 가장 큰 가치관이었던 ‘의리’를 바탕으로 겁없이 옳은 소리, 할 말하는 현장의 고집쟁이였고 화끈한 노동자의 생활을 계속했다. 동지는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싸움들 속에서 자본의 본질과 노동자의 단결에 대해 보다 풍부하고 실천적인 습득을 이루어낸다.

86년 6월 평상시의 일상투쟁과 회사 대중의 불만은 100여명이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 등의 싸움을 불러일으킨다. 이 싸움은 진흥요업 노동자들의 훌륭한 배움터였다. 김현욱 동지도 많은 걸 배웠다. 가장 큰 것은 동료에 대한 신뢰였고, 단결로써 쟁취하고 단결로써 자본가를 굴복시키고 단결 앞에 온갖 기만과 협박과 회유를 일삼으려는 비열한 회사측을 보면 노동자의 힘에 대한 무한한 감격과 기쁨을 느꼈다.

김현욱 동지는 이제 노동운동을 결심하고 맹목적으로 실천했던 과거와 다르게 대중은 무엇이며 ‘지도’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된 것이었다. 실제로 싸움 속에서 간악하고 교활한 자본가들에게 단지 불만만 터뜨린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할 뿐아니라, 문제해결을 회사측에 일임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단 한 번의 싸움이라도 이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힘을 축적 강화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노동자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보다 조직적으로 대응했어야 했다 우리들의 요구를 정확히 수렴해야 하고 또 수렴되어진 요구를 가지고 자본가에게 밀어붙일 수 있는 방법론이 있어야 했다.

이에 각 부서마다 대표를 뽑고 그 대표에 의해 의견을 수렴, 종합하여 전체 의견화하고, 전체 의견으로 정리된 것은 노동자 모두가 통일적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것은 민주 노조 건설의 초석이 될 것이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시각을 가지면서도 김현욱 동지는 많은 시행착오도 겪었다. 또한 잘못된 회사측 입장을 폭로하는 데 아는 것이 모자라 많은 부분이 딸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싸움은 승리했다. 억센 단결과 비타협적이며 당당한 노동자들의 진취적 행동이 끝내 임금인상투쟁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것이었다.

이후 김현욱 동지는 노동운동을 보다 목적의식적으로 보다 과학적으로 해나가기에 매진한다. 배움에 대한 욕구도 강력했고, 친구들도 적극적으로 만나면서 노동자의 단결과 이 사회의 모순에 대해 토론하고 깨우쳐 나가는 생활을 지속한다.

86년이 채 넘어가기 전 방위소집을 받았음에도 동지는 학습의욕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자기생활을 해나가고 자신을 보다 올바른 노동자로 규정짓기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았던 것이다.

87년 7월말 군복무중 휴가기간을 맞이하였다. 군 복무중에는 노동운동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데 한계가 있었고 폭넓은 시각을 갖는데는 여건이 어려웠다.

김현욱 동지는 휴가를 맞아 보다 유익하고 보람있는 생활을 위해 적극적으로 교회나 성당 그리고 노동자 권익을 위한 노동단체들을 찾아다니며 책이나 자료 등을 소개받고 현장의 소식도 들으며 자기 변화에 채찍질을 해나갔다.

8월1일부터 3일까지의 “인기노” 주최 수련회는 김현욱 동지가 보다 많은 노동형제들을 만나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대화를 가지며 자신을 동료들 속에서 평가하고 스스로 비판해 나갈 수 있는 계기였다는 점에서 무척 맘설레는 것이었다.

열정적인 김현욱 동지의 모습은 수련회에 임하는데 있어 더욱 맹렬하고 확고한 것이었다. 수련회장을 향하는 버스 안에서 노동자적 삶과 가치관에 대한 결연한 의지의 표현은 함께 동행한 동지들을 감동시켰고 그의 가슴 속에 맺힌 노동자로서의 감성들은 노래로서 열창되어졌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김현욱 동지는 수련회장에 도착함과 동시에 벌어진 조별, 팀별 모임에서도 유감없이 자신의 입장들을 개진해 나갔다. 팀가(팀노래) 및 조가(조노래)의 창작에 적극 참여하고 수련회에 임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수칙들을 올바른 노동자의 입장에서 정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잠시후...

“의리”를 생명으로 여기던 김현욱 동지는 그후 이어진 물놀이에서 죽어가는 동지를 구해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물에 빠진 동지를 구하고, 짧고 굵은 그의 인생을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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