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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길-당시 34세

신용길-당시 34세

신용길(당시 34세)

1957년 5월 7일 서울 출생
1982년 부산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졸업
1988년 부교협 문화부장
1989년 7월 전교조 부산지부 결성식에서 축시를 낭송했다는 이유로 구덕고에서 파면
1989년 8월 출근 투쟁을 하던 중 경찰에 연행.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다가 발병한 위궤양으로 병보석
1990년 1월 전교조 부산지부 교과위원장
1991년 3월 9일 동아대 부속 병원에서 위암으로 운명
신용길 동지는 89년 7월 전교조 부산지부에 가입, ‘1989년 한국 여름 그리고 교육 대학살’ 등을 발표하는 등 교육 민주화에 앞장서오다가, 그해 8월 전교조 부산지부 결성식때 자작 축시를 낭독했다는 이유로 구덕고에서 파면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25일 출근투쟁 중 국가공무원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데 항의, 단식농성을 벌이다 부산 구치소로 넘겨진 이후 위궤양이 악화돼 결국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났다.

신 동지는 그 뒤, 날마다 부산지부 사무실에 출근하며 교육시집 발간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위의 통증을 견디지 못해 입원했으나, 이미 악화될대로 악화된 위암으로 결국 운명하였다.

신용길 동지는 운명 직전 “눈만이라도 남아 동지들이 복직하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라는 유언과 함께 동아대 병원에 두 눈을 기증하였다. 그의 부릅뜬 두 눈은 앞을 못보는 가난한 뱃사람과 또 한 여인에게 이어져 지금도 변혁과 싸움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동지를 생각하며


아이들과 부대끼며 교육모순 깨달아 - 신문기사 중

신용길 선생님을 너무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신현수 선생님의 추모시에서 처럼 “살아남은 이들은 / 행사를 치루듯 장례를 치루고 / 그냥 자기 자리로 돌아” (<사람4> 중에서) 갈 수 없었다. 신용길 선생님이 남겨놓은 살아남은 자의 임무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조향미 선생님(32. 경남상고 교사)이 신용길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81년 부산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재학시절 교내 동아리 <등>시문학회에서 였다. 당시 조 선생님은 2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신 선생님은 군 제대 후 4학년이었는데, 신 선생님이 대학원을 마친 후인 84년 조선생님은 연산중학교로, 신 선생님은 주례여중으로 각각 발령받게 되었다. 이후 조 선생님은 부산진 여상을 거쳐 지금의 경남상고로, 신선생님은 구덕고로 부임하게 되고, 86년 두사람은 결혼하였다.

이후 87년 6월 항쟁을 겪으면서 신 선생님은 교육문제가 우리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러나 나름대로 자신의 교육철학을 가지고 생활하던 선생님은 전교조 부산지부 결성식에서 축시를 낭송했다는 이유로 해직되는 아픔을 당하셨다. 이에 출근 투쟁으로 맞섰던 선생님은 경찰에 연행되어 구속당하셨다. 구속되었다는 보도에도 놀라지 않았던 조 선생님이 정말 놀랬던 것은 신 선생님이 병보석으로 풀려나왔다는 것이었다. 90년 11월 부산위생병원에서 위암진단을 받은 이후 고신의료원, 광주의료원을 거쳐 91년 3월9일 동아대 부속병원에서 임종하기까지 조선생님은 “삶의 동반자 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자신이 죄스럽고 한스러웠다고 했다. <차라리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 우리의 죽음 뒤에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 딸들이 /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자 / …… /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아들 딸들이 / 우리와 같은 슬픈 역사를 살아서는 안된다. / 아이들의 잠든 이마에 입맞추듯 / 우리는 이 고난의 세월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리 -복직에의 꿈 >. 신용길선생님의 시 앞에서 우리는 숙연함을 느낀다. 고난의 세월을 사랑하며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좀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고 한 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추모글>


신용길 동지!

나를 과격하게 만든 이 역사적인 사건을 평생 잊지 않으리라는 신 동지의 시의 구절처럼 우리도 잊을 수 없습니다.

1989년 한국 여름 교육대학살을, 온몸 활활 불태우며 투쟁하던 신 동지의 생전의 모습을 오늘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복직에의 꿈을 키우며 신 동지가 적은 시 역시 잊을 수 없습니다.

“아내야 눈물짓지 마라/생활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차라리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우리의 죽음 뒤에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 딸들이/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자/”

그렇습니다. 끝내 갖은 탄압에 굴하지 않고 신동지가 쓴 시처럼 투쟁의 불꽃으로 살아난 신 동지.

신 동지는 죽지 않았습니다. 신 동지 제자들의 가슴에, 여기에 모인 동지들의 가슴에, 아니 신 동지의 거룩하고 숭고한 정신을 아는 세상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여기에 모인 제자들, 동지들의 가슴속에 뜨겁게 부활하고 있습니다.

신용길 동지!

우리 산자들은 당신이 이승에 남긴 두 눈에 전교조 합법성 쟁취의 그날, 참교육이 실현된 세상을 반드시 보여줄 것입니다.

그때 신 동지는 해방된 이땅의 푸른 하늘에서 청청하게 살아나 이승의 우리와 함께 마침내 목놓아 울 수 있을 것입니다.

신용길 동지!

그날을 약속하며 이제 우리는 울고 있습니다. 동지를 보내는 슬픔에, 신 동지를 죽음으로 몰고간 저들에 대한 치떨리는 분노에, 억울함에 우리는 울고 있습니다.

우리의 울음이 기쁨의 울음이 되어 신 동지가 비로소 편안히 잠들 그날을 위해, 살아남은 우리도 각오하고 끝까지 투쟁하겠습니다.

신용길 동지! 부디 편안히 쉬십시오. 이제 마지막 가는 길, 신 동지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러봅니다. 우리 모두 슬픔과 분노와 투쟁의 각오로 신동지 당신의 이름 목놓아 불러봅니다.

신용길 동지!

신용길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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