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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정보

신호수-당시 23세

신호수-당시 23세

신호수(당시 23세)

1963년 8월 8일 전남 여수에서 출생
1980년 2월 성동중 졸업
1983년 8월 검정고시 합격
1985년 6월 방위 근무
1986년 6월 11일 인천시 남구 소재 도화가스에서 근무 중 서울 서부서형사들에 연행 후 행방불명
1986년 6월 19일 전남 여천군 대미산 동굴에서 변사체로 발견
신호수 동지는 1986년 6월11일 오후 1시30분경, 인천시 남구 소재 도화가스 충전소에서 가스통 밸브작업을 하고 있던 중 서울시경 대공수사과 형사라고 신분을 밝힌 3명의 남자에 의해 연행되었다.

목격자 오욱현씨(인천시 남구 도화동 도화 LPG충전소 근무)의 말에 따르면, 3명의 형사가 무전기와 안테나가 부착된 회색빛 포니2 승용차에서 내려서 “신호수가 어디 있느냐”고 묻자, 가스통 밸브작업을 하고 있던 신호수 동지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들은 경찰이라고 신분을 밝힌 뒤, 함께 소파에 앉아 약 15분간 대화를 했는데, 그들은 겉봉에 “증거물”이라고 쓰인 봉투를 꺼내더니 윗부분을 찢고, 그 안에 든 유인물을 꺼내어 신호수 동지에게 “이게 너희집에 있던게 맞지?” 하고 묻자 신호수 동지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그 중의 한사람이 “이봐! 거짓말하지 마!”하며 묻는 말에 수긍하라고 다그쳤다. 이 말에 신 동지가 반발을 하자, 한사람이 약도를 꺼내어 가지고 “너 여기 살았지? 증거물이 나왔으니 순순히 인정해”하면서 재차 다그치며 동지의 혁대를 풀고, 주머니 안에 든 소지품을 확인한 후,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승용차 뒷자석 좌측에 앉히고, 잠시 후 출발 경인고속도로 쪽으로 진입해서 서울 방향으로 갔다고 한다.

이후 신호수 동지는 소식이 끊겼다가, 8일만인 19일 10시경 강윤곤등 3명의 방위병에 의해 고향집으로부터 불과 4km거리인 전남 여천군 대미산 중턱의 한 동굴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사체 발견지점인 굴바위는 여수시로부터 12km 떨어진 대미산 중턱으로 이곳은 도로에서 70°의 급경사로 100m가량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이 신 동지의 연고지이긴 하지만 5살 때 상경하였기 때문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악산이다. 동지는 흰색 면양말에 팬티만 걸친 상태로, 입고 있던 바지를 동굴 바위틈에 고정시켜 목을 맨 모습이었고, 팔꿈치 위의 양팔은 혁대로 감겨 있었으며, 소지품은 동굴내에서 불태워지고 일부만 남아 있었다.

당시 서부경찰서는 신호수 동지가 방위근무할 때 장판 밑에 모아둔 북한의 삐라(당시 군부대에서는 삐라를 많이 모은 병사에게 포상휴가를 보내주었는데 신동지는 이를 의식, 삐라를 대거 수집하여 장판밑에 보관하다가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제대, 나중에 이방에 살게된 사람이 경찰에 신고함)를 문제삼아 대간첩작전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이를 “장흥공작”이라고 명명하고, 신호수 동지를 연행한 것이 국회에 제출된 국정감사자료에 의해 밝혀졌다.

사건 당시 여수경찰서는 가족에게 통보도 하지 않은 채 형사 2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검시,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사건을 추정하고 변사사건으로 처리해 버렸다. 경찰은 1986년 6월21일 발견 이틀만에 전남 여천군 돌산읍 평사리 공동묘지에 가매장하고, 6월27일에야 가족에게 통보했다.

한편 가족은 사건 발생 11년이 지난 오늘에도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의문점


(1) 신호수 동지의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동지는 평소 명랑·쾌활하고 의지가 강하며, 어려운 가사를 고려하여 스스로 학교를 자퇴하고, 고학으로 대학진학을 준비할 만큼 효심이 깊었다고 한다. 성실, 근면한 신호수 동지는 독재체제하에 신음하는 사회현실에 깊은 관심을 갖고 각국의 자주화와 민주화에 관련된 서적과 유인물을 많이 읽었으며, 가끔 친구들과 같이 집에 와서 토론하곤 했다. 그리고 5·3인천사태 직후 경찰이 여수 집으로 찾아와 동지의 신원과 행방을 확인했다고 하는데, 신 동지의 연행이 5·3인천사태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

더구나 경찰이 “장흥공작”이라고 명명을 붙일 정도로 가치있는 사건의 혐의자를 연행 3시간만에 풀어주고 서울역까지 배웅을 하고 차비까지 주었다는 서부서 담당형사의 말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는 조사과정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이를 은폐하기 위한 의도적인 발언이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

(2) 신호수 동지는 서울시경 대공수사반을 자처한 세 사람에게 불법 연행된 뒤 소식이 끊겼다가 8일만에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이에 대한 해명이 없을 뿐 아니라, 경찰은 1986년 6월19일 사체가 발견되자 이틀 뒤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1986년 6월21일 재빨리 가매장 하였으며, 1986년 6월27일에야 뒤늦게 가족에게 통보한 것은 사실 은폐를 위한 기도로 밖에 볼 수 없다.

(3) 더욱이 변사체를 확인한 박산수씨(전남 여천군 돌산읍 평사리 도실부락 새마을 지도자)는 “사체를 살펴보니 백색 면양말을 신었는데 양쪽 발목이 피로 얼룩져 있었고 무릎에 상처가 있었으며, 양쪽 팔목에는 잉크색의 멍이 들어 있었다”고 얘기했다. 덧붙여 “느낌에 자살한 시체 같지는 않더라”고 말했다. 이처럼 사체의 상태가 타살 흔적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이에 대해 전혀 수사하지 않았다.

(4) 또한 최초로 사체를 발견한 방위병의 말에 의하면, 사체 발견시 목부분이 입고 있던 바지로 감겨져 있었고, 양손이 모아진 상태이고, 가슴부분은 양팔을 휘감아 등부분과 함께 허리띠로 감겨 있었으며, 펜티 차림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도저히 자살 행위라고 판명할 수 없다.

(5) 인천에서 성실히 근무하던 사람이 갑자기 고향에 내려와서 집 가까이의 험악한 산으로 올라가서 유서 한장없이 자살했다는 것은 전혀 납득할 수 없다. 또한 사체 발견시 자살 시기를 4-5일전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는 경찰 수사를 받은 직후이고, 경찰에 연행되고 사체로 발견 되기까지 신호수 동지를 보았거나 만난 사람이 직장, 집주변, 친인척을 포함하여 아무도 없다고 하는 바, 결국 수사 과정에서 살해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6) 경찰에서 신호수 동지가 작성하였다는 진술서의 필적은 원래의 필적과 다름이 필적감정원에 의해 밝혀졌다. 이는 동지가 경찰 수사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것을 은폐하기 위한 것에 다름아니다.

국립5.18민주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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