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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정보

이재호-당시 21세

이재호-당시 21세

이재호(당시 21세)

1965년 3월 15일 전남 광주 출생
1983년 2월 광주 송원고등학교 졸업
1983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입학
1986년 3월 18일 반미 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투쟁위원회 산하 ‘반전반핵 평화옹호투쟁위원회’ 위원장
1986년 4월 28일 전방입소 결사반대 및 반전반핵 양키고흠을 외치며 분신
1986년 5월 26일 한강성심병원에서 운명
1986년 4월28일 아침 9시30분 서울 관악구 신림동 4거리 가야쇼핑센터 앞에서 서울대 총학생회 주관으로 400여명의 서울대학교 2학년 학생들이 “반전반핵 양키고홈”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를 외치며 가두투쟁을 전개하였다. 반전반핵 투쟁위원장 이재호, 자연대 학생회장 김세진 동지는 전방입소 거부투쟁을 지도하던 중 예식장 옆 3층건물 옥상에서 온몸에 신나를 뿌리며 강제진압하려는 폭력경찰에 경고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한 폭력경찰의 강제진압 도중, 두 동지는 분신으로써 항거하였다. 시뻘건 불속에서 “양키고홈”을 외치던 이재호 동지는 추락하여 10분간이나 방치된 채 감을수 없는 눈을 감고 말았다. 이재호 동지는 전신 80%이상의 3도 화상을 입었으며, 김세진 동지는 전신 60%의 3도화상을 입었다. 몇몇 병원을 전전하다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진 두 동지의 상태는 절망적이었으며 병원 주변은 전경차량 6대와 사복경찰버스 2대가 배치되어 학생들의 출입을 막았다. 미제의 예속 정권은 1981년부터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양키의 용병교육인 전방입소 훈련을 강제적으로 실시하여 왔으며, 이에 두사람은 “전방입소 훈련 전면거부 및 한반도 미제 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결성하여 한반도에서 핵무기와 미군을 철수시켜 전쟁을 방지하고, 핵전쟁의 참화로 멸족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을 구원하기위해, 미제의 예속과 억압을 뚫고 자유와 해방을 찾기위해 최선봉에서 투쟁한 것이다. 김세진 동지는 5월3일, 이재호 동지는 5월26일 운명하였다. 이 투쟁을 계기로 반미구국투쟁은 급속히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한국의 운동사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열사가 남긴 글 <마지막 편지>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저는 현재 부모님께서 염려해주신 덕택으로 의.식.주에 큰 어려움은 겪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행동거지가 퍽 부담스러운 까닭에 원하는 공부를 깊게 할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제가 맡은 역할을 분명히 수행, 책임지고 난 다음 틈틈이 독서를 함으로써 자신의 방만함과 타락의 씨앗을 근원에서부터 제거하는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대한 효도를 물질적 봉양만으로 생각치 않고 있으며 효도는 첫째, 올바르게 사회에 봉사하는 의연한 삶을 개척하는 것 둘째, ‘승리’로서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이 힘든 결단을 가능케 하였으며 현재의 생활을 지탱해 주는 절대적 기초입니다. 물론 예고없는 저의 결단으로 인한 충격에서 오는 부모님의 슬픔과 노여움에 고개를 떨구지 않을 수는 없지만 저의 생각과 행동이 결코 공허한 불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이 장기적 전망과 믿음 속에서 증명되는 날, 기쁨의 해후를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아버님께서 제가 어떻게 된다면 홧병이 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아버님의 젊으셨을 때 활동으로부터, 아버님의 의연하심으로부터, 저는 최근의 문제가 사소한 것으로 간주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을 때, 제가 그러한 믿음을 갖지 못할 때, 저는 자신감을 상실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패배라는 묘비명을 남길 뿐입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기쁨과 슬픔을 포옹으로 표현한다지만, 역사적으로 우리집에서의 정(情)과 한(恨)의 응어리짐들은 가장 솔직한 삶을 서로 드러낼수 있는 것에 의해 하나하나 풀려질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전부터 저는 자신의 삶을 준비해왔고, 비로소 드러냈다고 봅니다. 지금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누님과 동생들에게는 의연함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저의 생활과 주변에 관계되는 것들은 스스로 해 나갈 수 있으므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제가 당장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은 편지를 쓰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가까운 날짜에 다시 연락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건강히 계십시오. 1986년 4월 2일 저녁 12시 서울에서 재호 올림 <이재호 동지의 마지막 편지 중에서>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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