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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정보

이종률

이종률

이종률

1902년 경북 포항시 죽장면에서 출생.
1922년 무렵  안동의 동명학교 진학. 독립운동가 이형국, 유동붕, 이지호 만남
1924년 배재중학 2학년에 진학. 고학생 갈돕회 회원 활동.
1925년 5월 최초의 사회과학연구 학생단체 共學會 창립 주도, 10월 투옥.
1926년 5월 불령선인 예비검속 체포, 경기도경찰부 유치장에서 한용운과 조우.
      6월 6·10만세운동 참여 후 渡日.
1927년 봄 일본 와세다대학 입학. 재일본 조선유학생학우회 활동.
        5월 신간회 동경지회 결성 주도, 간사 역임(‘李南鐵’, ‘南鐵’ 등 명의)
        여름 방학중, 밀양에서 독립운동가 황상규와 만남, 유학생 순회강연.
충남 예산경찰서, 경북 안동경찰서에 구속 수감.
1928년 3월 동경에서 재일본조선청년동맹 결성, 극동피압박청년간담회 개최.
      7월 근우회·신간회 동경지회 명의로 근우회 본부에 대한 비판 성명
       11월 조선학생맹휴옹호전국동맹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 수감(징역 10월).
1930년 4월 사회실정조사소 창립. 신간회 해체 후 관련 물품 수습 이관.
       6월 사회실정조사소 기관지 『이러타』를 창간, 편집인 겸 발행인 활동.
1932년 봄 경성제대 미야께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와 교유, 조선사회경제사
연구 활동.
1933년 4월 ‘衡平靑年前衛同盟’사건으로 체포, 구금.
1934년 5월 ‘미야케 교수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2년 선고. 1936년 6월 출감.
1940년~44년 사상범보호관찰령의 보호관찰 대상으로 지정. 조선건국동맹과 연계
활동. 경기도 가평군 용문산에서 숯 산판 경영, 동지 규합.
1945년 8월 조선학술원 창립 참여. 서기국 위원, 사학부 책임간사, 상임위원.
       12월 조선에스페란토학회 창립 준비 활동 및 발기자(‘李鈞’ 명의).
1946년 1월 ‘非蘇非美 外勢領御 統一建國’을 내세우고 民族建揚會 발기 창립.
1947년 2월 이극로, 조봉암 등과 민주주의독립전선 결성, 단정수립반대투쟁. 체포.
7월 한독당 『민주일보』 간행 참여.
1949년 申皓 명의로 『現政治路線批判과 그 新方向 -혁명 ‘正展開’ 캄파 組織의
提訴로서-』 간행.
1950년 9월 아내 宋喬 사망.
1951년 봄 경남 함양군 안의중학교 교감으로 부임.
1952년 봄 최익환 박진목 등의 정전평화운동에 참여, 부산으로 이주.
1953년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 부임. 동아대, 숙명여대 등 강의.
      『국제신보』 편집고문, 『부산일보』 논설위원 역임.
1955년 부산에서 민족문화협회 창립.
1956년『영남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
1958년 집을 찾아온 간첩 김창주 불고지죄로 부산형무소 수감.
1960년 4월 서울에서 민족건양회의 ‘4월 목요회의’ 개최.
       6월 부산에서 民主民族靑年同盟 결성
      10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발기회의 개최.
1961년 2월『민족일보』 창간 주도, 4월에 「민족통일방안대강」 게재.
       2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창립.
       5월 5·16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체포, 수감.
1965년 12월  안양교도소 출감.
1970년 양산 개운중학교 교장으로 재직.
1971년『祖國史의 분렬과 統一의 主潮』 출간
1974년 백산 안희제 선생 사적 답사 중 뇌졸중으로 와병.
1979년 ‘李一九’라는 필명으로, 『己未를 알자』(茂林社, 1979) 출간.
1989년 3.13 부산시 동래구 명륜동 자택에서 별세.
6월
2021년 4. 10.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

대전 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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