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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정보

이대용-당시 24세

이대용-당시 24세

이대용(당시 24세)

1963년 4월 3일 전북 고창에서 출생
1977년 인천 석남동소재 선학알미늄 입사, 야간중학교 입학
1986년 동양튜브에서 임금인상 30%쟁취 투쟁
1987년 8월 1일 산마루교회노동자들과 함께 인천지역 노동자 여름수련회에 참여하던중 동료를 구하고 운명. 화장
87년 8월1일부터 3일까지 매포수양관에서 열린 인천기노련 주최 ‘인천지역노동자 여름수련회’에서 섭씨 30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속에 수련회에 도착한 270여명의 노동형제들은 조편성과 방배정을 마치고, 뒤 순서인 물놀이에 들어갔다. 불과 1주일전 답사때는 위험표지판도 없었고, 물살은 빨랐으나 깊은 곳이라야 가슴을 넘지 않았기에 물놀이를 진행한 것이다.

그러나 물놀이 장소의 바로 옆에 얼마전에 불법골재 채취작업을 하여 깊은 웅덩이가 파여 있는 것을 몰랐던 일행 중 한명이 갑자기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발견한 3명의 노동자가 뛰어가 1명을 구했으나 그중 구하러 들어간 두명이 힘이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이에 수십명의 노동형제들이 인간사슬을 만들어 구출하였으나 그중 이대용, 김현욱, 박용선, 유인식 동지는 자신이 구해낸 동료들의 품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이 네명의 동지는 자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동료들을 구해내는 동지애로 산화하였다.



동지를 생각하며


<이대용 동지가 걸어온 길>

이대용 동지의 집안은 불타는 태양아래 뼈빠지게 농사짓고 먹을 것 입을 것 제대로 뭐하나 마련 못하는 사무치는 가난을 이기고자 절약과 궁핍 속에 발버둥쳤지만 결코 헤어날 수 없었다.

농촌에서 더 이상 주저앉기를 거부하고, 행여 도시에 올라오면 끼니라도 제대로 이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속에 정든 집과 고향을 등지고 동지의 집안은 인천에 정착했다.

지게를 져야했던 아버지와 어린 동지를 등에 업고 채소행상을 하셔야만 했던 어머님과 그 밑에서 험하게 살아야만 했던 가족들... 동지는 부모님의 아픔을 더욱 더 저리게 만들만큼 울음이 많았다. 또한 행상하는 어머님이 손님을 만나 물건을 풀어야 할 때면 등뒤에서 어머님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며 울었다고 하는 대용 동지... 어머님의 가슴에 슬픔과 한을 쏟아 부었던 갓난 시절 동지의 울음은 이후 성장하면서 지극한 효성으로써 어머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왔다. 동지는 자신의 성장과정을 정성들여 기록해 놓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어린 시절과 성장과정에 대한 기록을 한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자 모든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사랑하며 대변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동지는 삶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분명 어렵게 배고픔과 허기를 참아내며 공부를 하였으나 동지는 이 공부가 진정 인간에게 필요한 것인가와 대학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갈등하게 되었다. 하지만 동지는 억척같이 삶을 살아 오면서도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고, 성실하고 진실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잘 살지 못하는 이 사회의 구조에 분노를 느꼈다. 대학도 더 이상의 공부도 그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공장에서 노동자로서의 삶은 그가 살아온 것 만큼이나 비인간적인 대우와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그러나 동지는 여기에서 절망과 포기보다는 꿋꿋하게 일어서서 진정한 노동자의 삶을 살아갈 것을 맹세하였다.

더 많은 동료와 뜻을 같이 하기 위해 타동료를 만나 대화하며 자본가들의 착취에 대해 흔들림없이 싸워나갔다. 이 시기에 동지는 군복무를 위해 현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생활을 하면서도 동지는 노동자로서의 신념과 강한 의지를 다졌고 공부하고 실천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제대를 하고 바로 동지는 과거의 삶을 재확인하며 노동자로 더욱 더 헌신할 것과 이땅의 주인이 되기 위해 다시 현장에 뛰어들었다.

1986년 초반 진흥요업에서 착취와 비인간적인 대우에 반대하며 투쟁을 주도하였다. 노동자의 이익과 권리를 찾고 노동자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수많은 동료와 하나로 뭉쳐 단결을 다지고 자본가와 한치의 타협없는 싸움을 전개해 나갔다. 이것을 통해 동료들과 동지는 하나가 됨을 확인하며 앞으로 이땅, 모든 노동자들이 자기의 위치와 권리를 찾고 이 땅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죽는 날까지 노동자로 살아갈 것을 재결단하였다. 그 후 동지는 동양튜브에 입사해 자본가들의 끊임없는 착취에 더 이상 노동자가 멸시 천대 속에살 수 없음을 알았기에 그들의 진정한 해방의 길을 앞당기기 위해 다시 농성을 주도하였다. 임금인상 30%, 보너스 10% 쟁취, 그외 근로조건 개선 등 투쟁을 통해 그의 선도성과 동료에 대한 헌신성을 발휘하였다.

그 후 그는 선창산업에 입사해 변함없는 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동료들과 함께 노동자로서 올바른 삶을 결단하여 토론과 일상적인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그의 인간적인 면과 불굴의 투쟁정신은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동지에 대한 한치의 변함없는 의리는 다른 동지로 하여금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부모님께는 강한 효자로서 믿음직한 막내이며, 그의 삶은 부모님으로 하여금 힘을 주었고 흐뭇하게 하였다.

동지의 평상시 그런 모습과 삶은 수련회에서도 참가한 동료들의 모범이 되었다.

차 속에서 동료들을 향하여 죽는 날까지 진정한 노동자로 살아갈 것과 노동자의 단결을 강하게 외치며 투쟁하겠노라 다짐을 하였던 동지! 조별 토론시간에는 자발적인 문제제기를 하여 조의 신뢰와 단결력을 강화하고 후배들에 대하여 세심한 관심과 지도력을 역력히 보여 주었다.

물놀이 과정에서 물에 빠져 허덕이는 동지의 죽음을 그는 방관할 수 없었다. 수영을 잘 못하는 개인적인 조건보다 동지를 죽음에서 구출해야 된다는 신념이 더 강했던 것이다. 거의 의식을 잃은 동지를 구출하고 다시 또 물속에 뛰어들었던 그 강한 동지애여, 값진 희생이여! 동지는 우리들의 횃불이었고 우리로 하여금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이며 노동자의 단결과 해방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지 않았던가.

동지의 삶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고 불의에는 한치의 용서와 타협없는 투사였다.

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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