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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정보

정성규-당시 24세

정성규-당시 24세

정성규(당시 24세)

1965년 출생
1983년 충북대학교 철학과 입학
1985년 인문대학생회장 당선
1986년 학내시위 주도로구속, 1심에서 집행유예
1987년 청주 민청 총무
1988년 청주 민청 조직부장
1988년 8월 14일 수련회 도중 익사

87년공정선거 감시단으로도 활동을 하였고, 88년 청주지역 민주청년연합에서 지역운동을 하던 정성규 동지는 8월 통일문제 시민강좌를 마치고 수강생들과 함께 매포수양관에서 수련대회중 돌연한 사고로 익사하였다. 다음은 추모제에서 후배가 평소 동지를 생각하며 쓴 글이다. “동지를 잃는 아픔 속에서도 억센 생명력이 다시 일어서야함을 알기에 못다한 말씀이 무엇임을 알기에 눈물을 훔치고 나서렵니다. 형! 지켜보고 계시지요. 시련의 칼바람 속에서도 청년이 조각난 강토에 굳세게 서게 되는 그날까지 형 함께 하시는 것이지요. 죽어서도 우리들 속에 살아계시는 생명을 압니다. 이제 편히 쉬세요.”


 


추모의 글


고 정성규 동지 7주기 추모제를 맞으며


청주청년의 통일의지를 온몸으로 일으켜 세우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다 거친 물살에 곱디고운 20대의 청춘을 마지막으로 민족의 제단에 일생을 맡긴 그리운 우리들의 동지 정성규가 떠난 지 벌써 7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쉬움에 젖은 마음으로 잠시 외출하고 있다고 믿은지 어제 같건만 정성규 조직부장 이후 많은 사람들이 정동지가 걸어갔던 그 길을 이미 되풀이해서 지나갔습니다. 87년 민주화의 열기가 온세상 가득 넘치던 어느날 경찰 등의 폭력을 피해 근처 다방으로 함께 피신하면서도 시종일관 넉넉한 웃음으로 마치 아무일없는 사람처럼 예의 그 미소로 화답하던 동지의 모습이 이제는 잊혀져갈만한 시간임에도 더욱더 그리운 얼굴이 되어 떠오르고 있습니다. 통일이라는 말만 떠올려도 구속을 각오해야 했던 그 시절 시민통일강좌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동지는 우리의 곁을 말없이 떠나갔지만 이후 우리들의 수많은 조국통일투쟁은 이제 완성된 통일세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우리들의 몸을 힘껏 묶어놓았지만 우리들의 열망은 죽은 자와 산자 모두의 노력으로 결실의 열매들이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벌써 7년째 정성규 동지를 찾아오고 있지만 올 때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몸으로 더욱 열심히 이 길에 나서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습니다. 물론 청주민청의 모든 회원들이 입회 후 거의 한 번 이상 정성규 동지 앞에서 조국통일의 한길에서 낙오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 되었습니다. 정성규 동지는 이렇듯 죽어서도 산자들의 교육부장으로 결의를 모아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리운 정성규 동지! 그렇게 우리 함께 가도록 합시다. 우리들의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정동지의 내일을 살아갈 것이고 정동지 역시 변함없는 모습으로 언제나 우리곁에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동안 마음고생 많이 하셨던 어머님을 청주민청의 어머님으로 모시고 언제나의 그 생각으로 비탈진 이길 매년 오르겠습니다. 그동안 함께 추모제를 지내셨던 모든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7주년, 더욱 뜻깊은 날 되었던 것은 정동지의 동기 여러분들과 선후배, 그리고 가족 여러분 모두의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고마움에 인사를 다시 한 번 올리는 바입니다. 1995년 8월 13일 청주민청 8기 의장 이광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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