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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정보

최성근-당시 38세

최성근-당시 38세

최성근(당시 38세)

1955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
1986년 부산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1986년 부산 계성여자상업고등하교 교사로 부임.
1988년 부산 평교사협의회 참가로 교육운동 시작.
1990년 전교조 부산지부 사립지회 동래 지구장.
1991년 대동고등하교 전출.
1991년 전교조 대의원 사립지회 서구지구 대의원.
1992년 12월 13일 지병으로 운명.
최성근 선생은 남달리 학생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던 교육자였다. 교육운동가로서 그의 활동은 87년 6월 민주화투쟁에서 역동적인 민중의 힘을 직접 체험한 뒤 91년 전교조 대의원으로까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87년 사회민주화 투쟁의 열기는 교육운동에도 몰아쳐 교육악법철폐, 교원노동기본권쟁취, 평교사협의회운동 등으로 이어졌고 전교조의 기치아래 불법단체의 오명과 대량 해직의 시련에도 꿋꿋하게 참교육을 향한 걸음을 계속하여 왔다.

89년 이른바 ‘교육대학살의 해’에는 전교조 탈퇴각서의 파문과 함께 출근하는 전교조 가입 교사를 학생들 앞에서 무자비하게 연행해가는 등 교육운동의 탄압이 악랄하게 자행되었다. 냉혹한 탄압의 현실은 그에게 전교조 탈퇴각서라는 형식적인 항복을 요구하였고 이 속에서 교육운동가이자 교육자로서 많은 번민을 하였다. 이후 그는 탈퇴각서의 아픔을 딛고 많은 해직교사의 참교육의 염원을 가슴에 품은 채 계성여상에서 인사위 투쟁, 예결산 요구투쟁, 서명 투쟁을 통해 열정적인 활동을 보여주었다.

91년 그는 평소 그의 활동을 달가워 하지 않던 학교재단의 부당한 인사행정으로 인해 대동고등학교로 전출해야 했다. 대동고에서 그는 학교와 지회활동에 보다 정열적으로 힘을 쏟으며 학생안전공제회, 보충수업비, 5월 서명투쟁을 주도하고 서부지부에서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쉽게 낙담하지 않았으며 ‘부딪혀보자, 길은 정해졌다’며 동지들에게 힘을 주며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몰고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 쉼 없던 교육민주화의 삶에 병마(간암)가 찾아왔고 많은 동지들의 안타까움을 뒤로 한채 92년 12월 13일 숨을 거두었다.



동지가 남긴 글 글


<일기>


6월 24일 (수) 맑음


비가 올 듯한 분위기인데도 그냥 그대로다.

오늘의 행사를 알고 있기에 다소 불안한 마음으로 출장 허락을 받은 다음 확인하니 그대로 진행한단다.

그리고 이미 몇몇(서울 등) 지역에서는 전 교사를 상대로 서명에 대하여, 상부지시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o, x표를 적어 내어 명단을 파악 한단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말이고 대응방법이다.

이렇게까지 안달하면서 상식이외의 대응방법을 펴는 이유는?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 아님 단순한 엄포용, 아님 더 이상의 확산을 방지하겠다는 생각, 그것도 아니면 교육부보다 더 높은 곳의 결정에 대한지지 표시.

왜들이러나. 교사 대우를 좋게 하자는 것이고 그러면 더 우수한 인재가 교직에 올 것이고 그 우수한 교사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는 학생은 더 우수할 것이고, 그러면 우수한 학생을 싫어한다면 이 나라의 기둥이 바르게 성장하는 것을 거부하는 셈이다. 그럼 이나라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발전보다 잠깐의 자기 안일을 위하여 일을 한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제사. 즐거운 일일진데 별로 즐겁지 못했다.


5월 15일(금) 맑음. 스승의 날(?)

부끄러운 날. 하지만 작년보다는 그 부끄럼이 덜한 날이었다. 왜냐고? 수업이 없었거든. 그리고 바깥 행사도 없었고, 수업시간에 부르는 아이들 노래는 왜 그렇게 그 자리를 부끄럽게 하는지 지금도 낯이 간지럽다. 조촐한 체육대회 마치고는 나도 사랑하는 몇몇 제자들로부터 꽃 선물을 받았지만. 해직샘들한테 가서 한잔 걸치고 늦게 들어왔다.

내년엔 좀더 떳떳하고 훌륭한 교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겠다.


5월 18일(월) 맑음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벌써 11년째구나. 세월은 빨리도 흘러가는데 그렇게 많은 피를 마신 미눚와 자유는 왜 이렇게 더디게 오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더 많은 피를 원하는지.

민주주의를 위하여 죽어간 그들을 위해서도 이땅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빨리 와야겠지.

아파서 일찍 귀가. 밤새 열에 시달림.



4월 16일(목) 맑음

피곤하여 학교에서 계속 잠만 자다가 집에 온 것 같다.

주례 알로에(형님 친구) 가게에 갔다 알로에 하난 구입하고 집에 왔다가 산에 물 떠 옴.

책(재미있는 질병과 인간의 역사)를 주문하였으나, 내일 가지러 가야겠다.



4월 19일(일) 맑음 -약 구입 60,000-

이 놈의 날씨는 봄도 모르고 지나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아이들 북적거리는 소리에 잠이 깰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아이들과 노닥거리다 ‘우리교육’ 축구팀에 갔다.

잠깐 걸어다녔는데 피곤하다.

요즈음은 너무...

안두희가 입을 열었고 백범 암살의 배후에는 친일파가 있다. 나쁜놈들. 나는 이 나라에 부탁하고 싶다.

이번 기회에 배후를 철저히 밝혀내어 민족의 정기를 바로 잡자고.




동료의 글


이웃사랑 실천한 참교사

김 영 섭 (계상여고 교사)



엷은 회색빛 구름이 하는의 파아란 빛을 흐트려 놓았다.

내가 늘 등교하며 바라보던 먼 산이 저기 어디쯤이었는데 안개인가?

산 앞으로 버려진 스모그인가?

정돈되지 아니한 나의 일그러진 개념들의 파편들인가?

오늘의 이 비내림이 그치고 맑은 하늘 아래서 내 시야를 멀리 던져 볼 수 있는 이마살의 한숨 속에는 기억에서 잊혀질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

1989년 3월 내가 사회 직장에 사표를 쓰고 교사의 직분으로 부산 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에 첫 부임을 하여 망설임이 많았던 시절 -동료라고 칭하기가 왠지 어색한 교무실의 분위기, 학생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나의 위선이 드러나는 가면, 나의 우유부단한 성격, 그리고 지금에선 잘 기억되지 않는 크고 작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 가던...등- 에 한 젊은 선배교사가 이야기를 자주 붙여왔다.

그러면서 나의 밀실을 기척도 없이 자꾸만 열려고 하였고, 나는 더욱 더 자기 보호본능을 발동시켰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내가 너무 옹졸했고 비겁했던 것 같다. -그는 나와는 다른 생활수준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방면(영화, 교양, 도서등)에 있어 식견이 넓었고, 호칭을 부르기보다는 친숙한 어깨침으로 인사를 할 수 있는 독특한 표용력을 가진 키 크고 잘 생김 때문이 아닐까?- 상대적으로 빈곤에 찌들린 난 자신의 자격지심이었다고 생각하니 그 선배가 떠나간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내가 더욱 부끄럽기만 하다.

한편으로 그는 똑바른 사람이었다. 교장선생님이나 이상을 달리하는 사람이 어떤 소리를 하면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꾸를 했으며, 논리를 앞세웠다. 그러다 행여 직분의 힘으로 논리가 무시되어 버리면 울분을 참지 못하여, 혼자 있을만한 공간을 찾아 의견을 같이하는 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차후의 계획을 세우곤 했다.

그럴때면 나는 “어떻게 저런 무례한 언행을 할까?”하면서 내심으로 최선생을 가볍게 보았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이 열악한 교육환경은 언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겠는가?”라는 말에 그 당시에는 내가 뭐라고 대꾸도 했지만, 지금은 ‘아! 이런 모습을 남기게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은 내가 선배인 최성근 선생을 ‘형님’이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90년 2월의 일이다. 교사생활 1년을 마감하는 졸업식 날이었다. 난 정말 울적하고 섭섭했다. 정말 당시의 학생들을 상당히 좋아했기 때문인지, 나의 교사 1년이 허망했기 때문인지는 지금 잘 모그렜지만 그날 저녁 혼자서 귀가하여 아내랑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잠자리에 누웠다.


12시가 조금 넘었을 시간이다. 갑자기 단칸방 유리창이 누구에겐가 조용하지만 아주 아프게 두들겨 맞으며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아내가 누구냐고 했고 난 옷을 입으려 하고 있었다. 급히 돌아서는 아내의 입에서 “최선생님이예요.”하는 것이다. 나의 옷차림. 계면쩍은 얼굴을 보면서 “내 이렇게 있을 줄 알았지. 섭섭하지. 한잔하고 싶어서 찾아왔다. (손에는 양주 한 병을 들고 있었다.) 어때? 내가 첫 부임하던 해 졸업식에서도 네가 느낀 감정과 같았다.”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특별한 인사법을 또 한 번 내게 보여 주는 것이다. 가슴 깊은 나의 밀실을 부수어 버리는 힘찬 손길이 나의 어깨에 유감없이 내려 꽂히는 것이었다. 참으로 그 형님은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우리나라의 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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