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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정보

최종철-당시 24세

최종철-당시 24세

최종철(당시 24세)

1958년 2월 8일 충북 청주출생
1977년 2월 청주고등학교 졸업.
1977년 3월 부산대학교 공과대학 조선공학과 입학
1979년 10월 부마 항쟁 참여
1980년 6월 5.17 조치후 구속. 3년 선고받고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1981년 5월 11일 대전교도소에서 출소. 교도소 생활의 후유증으로 고생
1981년 9월 1일 오전 11시 30분 심장마비로 운명

최종철 동지는 청주에서 나서 고등학교를 나왔고 부산대로 진학하여 곧바로 학생운동에 헌신하였다. 학교시절 유신독재가 기승을 부리고 여차하면 긴급조치로 잡혀들어가야 하는 그 암담한 시절에도 학교에 각종 써클을 조직하고 줄기차게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3학년 때인 1979년 10월 박정희 정권을 결정적으로 분쇄하는 역할을 했던 부마항쟁에 앞장섰다가 수배를 받게 되었다. 그후 수배의 몸으로 청주로 돌아와 학교와 청주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바삐 뛰며 동지들을 규합하였고, 80년 민주화의 봄이 도래하는 듯 싶을 때에도 지칠 줄 모르고 정열적으로 활동하여 주위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러했던 동지는 80년 5월 쿠데타로 등장한 신군부세력 전두환 정권에 의해 구속되어 군사재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대전교도소, 영등포교도소를 전전하면서 가열찬 투사의 모습을 잃지 않았고, 1981년 5월11일 출감하였으나 수배생활과 고문, 징역생활에서 얻은 병마(신경통)와 싸우다가 출감 4개월도 채 안된 9월1일 조국의 민주와 통일을 보지 못하고 동지들의 눈물을 뒤로 한 채 심장마비로 운명하였다.


 


동지가 남긴 글 <친구에게 보낸 편지> 박형! 몇차례 내린 흰 눈이 교정에 남아 있는 것 말고는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던 겨울 날씨는 찾아볼 수 없는 포근한 오후. 점심을 마치고 몇차례 (정확히 세 번째) 자네의 소식을 묻네. 부강 공업고등학교에서 돌아온 “수취인 不在”의 편지를 읽자니 더욱 더하여 지는 그리움이 일어나는구먼. 밀알의 동만 친구로부터 자내의 제대소식과 부강 공업학교로 발령받아 열심히 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조금은 야속하고 반가운 심정에 - 직접 자네로부터 보고 받고 싶었던 욕심 - 곧장 부강공업 고등학교로 보낸 편진데, 되돌아왔고 보면 조금은 허전하지 않았겠나? 동생에게 온 편지에 자네가 부강 중학교에 있다는 소식 듣고 다시 자네를 찾아 보는 걸세. 너무 처음부터 야단만 친 것 같으니, 미안코. 자네의 생활 어떤가? 일전에 들으니 자네가 다니는 학교가 종합대학교로 승격했다더군, 축하를 해야겠고, 부모님, 형님, 동생의 안부 - 모두 평안하시겠지만 얼마 안 있으면 항소심이 육본에서 있을 것 같고 일심에서 받은 3년은 그대로 결정될 것 같아 또 그렇게 항소 이유서를 썼고 말야. “삶의 이방지대”란 말 그대로 내가 비비고 기대지 못할 것 같은 곳처럼 느껴진 지난 처음의 생각은 바뀌어져 가고 내 생의 한구석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친근함을 이제 이곳의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통합하고 수용하든데 - 때로는 감사의 기쁨까지도 동반하는 - 힘이 되어주더군 신은 결코 감내하여 낼 수 없는 고통을 주시지 않는다는 믿음, 정말 중요하더군. 내 이야긴 다음 기회에 더 계속하기로 하고 많이 변한 것 같은 바깥소식 접할 때마다 느껴진 느낌이네만 주님의 도리대로 살아가기 어려워지는 모양인데 몇일 있으면 찾아올 메시아의 탄생의 진정한 기쁨을 2000년전 이야기 아닌 이 나라와 이 겨레의 오늘의 이야기임을 기원해야겠지. 항시 주경야독의 바쁜 삶을 가는 자네의 성실성을 높이 보는 나일세. 자네의 가는 길에 성자의 돌보심이 같이 했으면 좋겠군. 그럼 다음에 만나기로 하고…… 안녕. 1980년 12월 12일 철. TO. 동만 오늘은 월요일… 태양이 떠오른 후니까 아침인가 보다. 이곳에서는 가장 생기에 넘치고 즐거운 날 이기에 웅성거리는 주변의 분위기에 위축된 인간의 마음에 삶의 원기를 불어준다고나 할까. 뜻밖에 여름이 다 지난 가을의 어느날 밤에 보는 친우의 서신은 무한한 기쁨이었다네. 일상적으로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이곳에서도 삶의 리듬감을 찾으려는 노력과 의욕은 항상 꿈틀대고 있다고나 할까. 늘 건강하고 하루하루 진리를 캐는 노력으로 소망가운데 살아간다는 나의 진실도 친구도 어떻게 받아드릴지!…… 친구여! 자네를 통하여 들은 밀알의 소식…(나에게 잠시 지난 추억을 되살려주는 것이지만) 정말 반가웠네. 밀알의 모든 친구들에게 이 친구의 건강과 굳은 믿음과 소망된 삶을 전해주게나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청주 제일교회당…… 나의 믿음을 키워주던 그곳의 기억은 일요일교회 종소리로부터 살아져 나와 우리 밀알 친구들의 영상과 함께 즐거운 휴식의 시간을 내게 준다네. 인숙양의 불행한 교통사고… 주님의 은총으로 하루 빨리 완치되길 빌겠네. 자네 그간의 생활은 어떠한가. 굳센 의지로 살아가는 자네의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할 내 입장아닌가. 3년이라는 세월의 장벽이 비록 우리 사이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자네들의 기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어찌 세월의 길음을 탓할 수 있겠는가. 청주 제일교회의 모든 분들과 우리 밀알의 발전을 항상 빌겠네. 늘 친구들이 발전되는 삶의 소식을 접하길 원하며 굳센 믿음으로 무장하여 이 어렵고 험한 세상 주님을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정절을 굳게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원하겠네. 청주 제일교회 청년회장을 비롯한 회원님들께 이놈의 안부와 아울러 건강과 발전을 기원한다는 말 전해주고 모든 것이 여의치 못한 사정으로 여기서 붓을 접어야 하는 아쉬움 친구들의 회신으로서 풀기를 원하면서 지금도 이 나라와 이 민족의 앞날을 주께 간절히 기도드리며…… 안녕. 1980. 9. 8. 친구가


 


동지를 생각하며 - 제막식에서 동지의 둘째 형님이 바람아 세차게 불어라. 민주의 횃불에 불을 붙여라. 아직도 이땅은 폭력과 불의, 거짓과 기만술, 독재가 우리 땅을 황폐케 하고 있다. 너! 민주의 횃불이여. 이땅을 태워 거룩히 하여라. 민주의 제단이 거룩한 이들의 손에 의해 쌓여지도록. 민주를 열망하며, 피땀으로 얼룩진 노동하는 자들. 사랑하던 종철아! 아직도 이땅은 네가 가슴 답답하면서 우리의 곁을 떠나던 그때와 같이 깜깜하고 답답하다. 우리의 목을 조이며 우리의 숨결을 끊어 놓는다. 어둡고 깜깜하면 곧 새벽이 온다. 네가 절규하며 부르던, 정의와 사랑에 목말라 외치던 이땅의 민주와 거치른 노동으로 육신이 타고 찢긴 노동자, 농민의 복된 민생의 실현을 위해 몸바쳐 이루리라. 종철아! 먼저 가신 영령들과 함께 이 민족의 참다운 자주독립, 해방을 위해 두눈을 부릅뜨고 우리의 가슴에 살아 있거라. 냉전을 끊고, 삼팔을 무너뜨리고, 남과 북이 흰옷입은 행렬로 뒤덮일 때 우리는 노래 부르리라. 민주 만세, 복된 민생만세, 민족통일 만세, 만세 만세 만세…… 84. 11. 10 너의 제막식에 - 둘째 형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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