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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행사

故 한상근 열사 27주기 추모제

○ 일 시: 2024년 2월 4일(일) 오전 11시
○ 장 소: 마석 모란공원

행사 정보

일요일 2024-02-04
지도보기 마석 모란공원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한상근(당시 26세)

1971년 전북 김제 출생
1990년 금산상고 졸업
1991년 대한체육과학대 (현 용인대)격기학과 입학
1994년 복학, 농촌문제연구회 활동
1995년 용인대 9대 동아리연합회 부회장
1996년 동아리 회장, 총학생회 정책국장
일본의 독도망언 항의차 일본대사관 항의 방문중 일본 대사관 넘어감. 이에 불구속 처리됨
1997년 용인대 11대 동아리연합회 회장
김형찬 대책위에서 15일동안 농성단 활동
용인대 학자추 ‘대학종합평가인정제’ 소위원회 위원
1997년 2월 10일 04:30 분신
1997년 2월 13일 12시 15분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에서 운명

시대의 양심을 실천했던 한 청년. 꾸밈없으며 소박하고 언제나 따뜻한 웃음으로 감싸주었던 소중한 사람. 전태일 평전을 읽고서 열사의 삶을 배우겠다고 자신을 바보회장이라 불러달라던 꾸밈없는 솔직한 모습을 가진 청년. “정도 없고 사랑도 할 수 없는 사회, 인간의 가치보다 돈의 가치가 높은 사회,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이 사회 현실을 바꿔내고 사랑과 의리가 넘치는 세상을 후세에게 남겨주고 싶다”라고 말했던 한 청년이 지난 2월 10일 새벽 4시 30분경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호소하기 위하여 분신을 기도했다. 한상근 동지는 병원 이송중에도 동료 학우들에게 “운동을 열심히 해달라! 괜찮으니 너무 걱정마라!”를 계속적으로 외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뚜렷한 유서나 구호를 남기지는 않았으나 운동의 길을 걸어 가며 힘들어 하는 동지들의 고통을 다 짊어지고 갈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일 듯하다. 또한 KBS기자의 “무슨 문제로 분신을 했는가? 학내 문제인가?”라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고 한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한상근 열사의 분신은 학원자주화 투쟁의 과정속에서 학우들의 동참과 학교당국의 일방적 학사운영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용인 경찰서에서는 집안문제로 분신자살하였다고 한겨레 신문에 제보하기도 하였으며 학교당국도 단순 비관자살로 몰고 갔다.또한 한상근동지의 장례를 치른 후에도 공식적 성명이나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또한 학교당국은 학생대책위와의 협상 중에도 계속적으로 책임 회피를 하였다.

동지는 평소 “나는 조국과 연애하고 조국과 결혼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는데 의협심이 강해 항상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으로 96년 일본의 독도 망언이후 민족의 자존심과 자주권을 지키고자 일본 대사관 항의 방문시 홀연 대사관 담을 넘어 한국 청년의 기개를 보여 주기도 했다. 또한 작년 12월 경희대 김형찬 학우가 안기부 요원에 의해 불법연행 당해 경기도 대공분실에서 분신하였을 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대책위 농성단에서 15일 이상 활동을 하였고 날치기 노동 악법, 안기부법 철회 투쟁에 항상 앞장서기도 하였다. 동지는 동아리 연합회 회장으로 밤낮없이 뛰어다녔고 97년 용인대가 ‘대학종합평가’를 받게 됨에 따라 총학생회 학원자주화 추진위원회 산하 ‘대학종합평가인정제소위’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학우들의 권익을 실현하기 위하여 학생회의 요구를 무시하는 학교당국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의 삶은 언제나 학우들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며 항상 투쟁하는 삶이었다. 허리잘린 한반도의 현실과 농민, 도시빈민, 철거민 등을 위해 투쟁하고자 하는 자신이 ‘흙사랑’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에 눈물을 흘리며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민중이 주인되는 사회를 절절히 염원하였다. 한상근 동지는 이처럼 조국 사랑 민중사랑에 항상 헌신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나 그렇듯이 힘들었던 때도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남긴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때로 자신에 다가오는 안락함과 개인주의적인 생각에 유혹을 느끼기도 하고 고민도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열사는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가혹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고 그런 나약한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렇듯 동지의 숭고한 조국사랑, 학원사랑, 민중사랑의 정신과 순결한 양심은 그 무엇으로도 결코 더럽혀 질 수 없는 것이다.

열사가 생전에 그렇게 따라 배우려 했던 바보회 회장 전태일. 그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한 애국 청년 한상근 동지를 보내며 우리는 그가 남긴 글을 되새겨본다. 부끄럽고 비겁하다! 더러운 생각을 한다! 나약하고 개인주의에 물든 내 자신이 정말 싫다. 진철원 열사가 생각난다. 양심이 꿈틀거릴 때 움직여야 한다고 나는 양심도 없었는가? 나는 죽은 것이다. 수많은 열사들이 죽었을 때 죽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겠노라고 맹세했던 모습은 어디 갔는가! 동지들이 중도에 포기하고 그만 두었을 때 나는 무어라 말했는가! 나는 죽었다. 나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96년 여름 농활에 쓴 것으로 추정됨>

동지의 글 1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무척 망설이다 대답도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대답을 할 수 있다. 참된 삶이란 불의를 보고도 그것을 외면하고 타협하는 삶이 아니다. 정의로운 삶 바로 나의 심장에 묻힌 양심을 꺼내어 불의를 깨기 위한 삶이다. 또한 실천이다.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옳다면 한다. 동물처럼 살아가는 것은 불의와 타협하며 비겁한 나 자신을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자주성이 없는 삶이다. 나는 부끄럽게 살기 싫다. 비겁하게 살기싫다. 세상에 적당히 길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면 죽는게 낫다. 나는 참된 삶을 살 것이다. 애국하며 살 것이다. 어제 드디어 경원대 학우들이 승리의 깃발을 향해 7천 학우들이 어깨동무하며 거리로 거리로 나가 인간의 생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든 이에게 비수를꽂고 이젠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얼굴도 다릅니다. 이름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조금씩은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만큼은 결코 갈라놓을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흙사랑입니다. 사랑과 의리 믿음으로 모인 흙사랑입니다. 주위에 있는 그 어느것이 우리의 사랑과 의리를 깨려고 한다면 맞서 싸웁시다. 혼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어깨동무 합시다. 싸웁시다. 함께 한다는 것보다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려 오는 조국이 있고 동지가 있고 사랑이 있지 않습니까.

동지의 글 2

나는 지금의 사회가 싫다. 정도 없고 사랑도 할 수 없는 사회. 인간의 가치보다 돈의 가치가 높은 사회. 농촌의 꼬마녀석들이 해맑은 웃음에 먹구름을 드리우는 사회.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조국. 그것도 모자라 민족이 다 죽어가고 있는데 같은 민족이라도 유일하게 도와주지 않는 조국 나는 지금의 사회가 싫다. 나는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나에게 물어보겠지! 나는 자랑스럽게 말을 해주고 싶다. ‘응’ 너희들에게 부끄러운 조국을 남겨주지 않기 위해 힘차게 투쟁했다고, 하지만 나는 지금의 나는 비겁자가 되려고 한다. 개인의 안락만 찾으려고 한다. 아직도 나에게 개인주의가 많은 낡은 사상이 존재하고 있다. 이제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반드시 이기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스러운 흙사랑 동생들에게 희망을 줄거다. 다시금 사랑이 넘실거리는 흙사랑을 만들 것이다. 흙사랑 동생들아 그동안 미안했다. 결코 우리에게는 개인주의와 낡은 사상 그리고 비겁한 삶 개인의 안락같은거 하고는 어울리지 않는가 보다. 돈은 없어도, 잠을 제대로 못자도, 여가 생활을 즐기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자주, 민주, 통일과 사람이 중심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신념과 실천 그 속에서의 우리들의 끈끈한 동지애로 모든 행복을 찾는가보다. 농촌꼬마들의 얼굴에 항상 웃음과 밝고 희망이 있는 조국을 물려주기 위해 함께하자. 후배들에게 통일된 조국을 물려주자. 후배들에게 사랑과 의리의 공동체 사회를 물려주자. 우리는 갈갈이 찢겨 길바닥에 나뒹굴더라도 후배들에게는 희망이 있는 조국을 물려주자. 그러면 후배들은 우리들을 이야기할 때 전설처럼 이야기 하리라.

동지의 글 3

흙사랑 식구들 보게나 나도 여러분과 단 일초도 떨져 있기 싫다!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여러분을 챙겨 주고 때로는 배우면서 함께하고 싶다! 눈물도 같이 흘리고 술먹고 죽을때까지 같이 마셔보기도 하고 싶다. 하지만 조국의 현실은 항상 여러분과 함께있는 시간을 주지 않는다. 번만이는 이렇게 생각한다. 비록 몸은 여러분과 많은 시간을 같이하지 못하고 있지만 흙사랑 회장으로서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소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지들 주위에서는 동지들이 불길에 휩싸여 소리치며 죽어가고 맞아서 죽고 아직도 광주의 어린꼬마부터 할아버지까지 임산부 처녀의 젖가슴을 두부처럼 자른 학살자들은 잘못없다고 법정에서 큰소리치고 있고 반인륜적인 학살을 배후조종한 자유의 수호신 미국은 공개사과조차 하지 않고 농민아저씨의 이마에 주름살은 계속 늘어나고 북한 동포들이 하루 쌀 100g과 나무껍질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또한 철거민들 노점상인들은 정부가 깨끗한 거리를 만든다면서 강제로 철거하여 기본적인 생활조차 누리지 못하고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다는 노동자는 아직도 일만하는 기계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불공평한 사회를 보면서 이것들을 외면하고 흙사랑 회장을 잘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흙사랑은 이러한 불의를 외면한다면 이미 흙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따라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흙사랑 동지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동지라 부르고 싶습니다. 현재 많이 힘들고 지치고 슬퍼도 눈물 흘리지 맙시다. 우리 몸이 갈갈이 찢어져 죽어도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양심을 버리지 맙시다. 아무리 가슴아픈 일이 내 주위에서 일어난다고 해도 우리는 울지 맙시다. 우리는 가야 합니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우리는 가야 합니다. 주위에서 동지들이 힘들다고 더 이상 지쳐서 못가겠다고 한다면 끌어주고 그래도 못간다고 한다면 업고서라도 갑시다. 뛰어가지도 말고 한발 한발 동지들과 함께 갑시다. 우리의 모든 것을, 전부를 내주어도 갈길은 갑시다. 끝까지 못가겠다고 울기만 한다면 버리고라도 갈길은 갑시다. -갈길을 멈출수 없습니다. 뒤에서 울기만 한다면 가슴은 찢어지게 아프지만 갈길은 가야겠습니다. -번만- 그리고 더 이상 울지 않겠습니다. 투쟁! 끝까지 경인총련 출범식을 사수했던 조국의 아들, 딸들, 비내리고 졸리는 것을 참으며 오직 경인총련 강화만이 민족해방을 조국통일을 앞당기는 길이기에 우리는 열심히 팔뚝을 치켜 올리며 목청터져라 소리지르며 수원거리를 내달렸지! 그 모습은 희망을 주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어! 바로 애국을 실천하는 청춘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가는길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지! 집안문제, 개인적인 고민, 최루탄, 백골단 그 어느것도 막을 수 없어! 우리는 계속 전진 뿐이야. <96년 5월6일 경 쓴 것으로 추정되는 동지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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