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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정보

김영균

김영균

김영균

- 1971년 11월 4일 서울 출생
- 1987년 서울 대원고등학교 입학
- 1989년 참교육을 고민하는 소모임 ‘목마름’결성, 홍보부장 역임
- 1990년 3월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입학. 민속학과 학생회 산하 ‘민속문화연구회’를 결성, 초대회장 역임. 교육문제와 사회문제 고민.
- 1990년 8월 조국통일 범민족대회 통일선봉대로 참가, 여름 농촌활동 참가. 우루과이라운드 반대 경북농민대회에서 마당극 ‘새벽을 밟으며’ 공연
- 1991년 4월 민속학과 부학생회장, 솔뫼 교지편집위원회 대외사업부장
- 1991년 5월 1일 ‘고 강경대열사 추모 및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안대인 결의대회’ 도중 ‘공안통치 분쇄, 노태우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
- 1991년 5월 2일 오후 8시 13분 경북대 의대 부속병원 화상병동 301호에서 운명
- 제 15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동지는 고등학교 때 교육문제와 사회문제를 고민하는 소모임 ‘목마름’에서 활동하는 등 일찍부터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하였다. 학교 총학생회 선거가 끝나고 서울 집에 다녀온 동지는 눈빛이 더욱 깊어져 있었다. 총학생회 선거에서 지고 허탈한 심정으로 서울에 올라간 동지에게 ’90년 11월 8일 한양대 옥상에서 투신한 최응현 열사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최응현 동지는 동지의 절친한 친구의 형이자 고등학교 때 활동하던 ‘목마름’을 도와주며 마음의 의지가 돼주던 분이었다. 그 후 동지가 자주 하기 시작한 말이 ‘도망갈 곳을 만들면 안 된다’였다. 5월 1일 새벽까지 집회준비를 하고 오전에는 선전을 하고 집회 앞풀이 풍물판에서 북을 치던 동지가 집회 시작과 더불어 불을 달고 뛰어온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던 무렵의 동지는 조숙한 신입생이었다. 고등학교 때 교육문제와 사회문제를 고민하는 소모임 ‘목마름’에서 활동하면서 이미 치열한 고민 속에서 성장하던 그였기에 선배들에게는 기특하면서도 어려운 후배로, 동기들에게는 믿음직한 동지로 옆에 있었다. 1학년 여름 통일선봉대에 참가하여 활동하다 다리를 다쳤다. 절둑거리는 다리로도 항상 선봉에 서던 동지는 ‘문선대 사람들은 우리와 똑같이 활동하면서 밤에도 잠안자고 연습하더라’며 힘든 모습을 감추었다.

학교 총학생회 선거가 끝나고 서울 집에 다녀온 동지는 눈빛이 더욱 깊어져 있었다. 총학생회 선거에서 지고 허탈한 심정으로 서울에 올라간 동지에게 90년 11월 8일 한양대 옥상에서 투신한 최응현 열사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최응현 동지는 동지의 절친한 친구의 형이자 고등학교 때 활동하던 ‘목마름’을 도와주며 마음의 의지가 되주던 분이었다. 그리고 나서 동지가 자주 하기 시작한 말이 ‘도망갈 곳을 만들면 안된다’였다.

1학년 겨울방학 때 공장생활을 하고 받은 월급을 털어서 ‘민속문화 연구회’에 기증할 북과 동지가 다니던 대원 고등학교에서 해직되신 선생님이 하시고 계시던 서점에서 사왔다며 책을 한 보따리 풀어 놓았다. 이제부터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겠다며 풀어놓은 책은 각종 사회과학 도서로 가득했다. 그리고는 자취방에 커다랗게 생활수칙을 써붙였다. ‘1.시간약속을 잘지키자. 2.모든 일은 주체적으로 3.하루 책 50쪽 이상 읽기. 4.바른 말 고운 말 쓰기 5.민중을 잊지 않고 사랑하는 겸허한 자세로 생활하자.’

그리고 몇 달 후 동지의 더욱 깊어 진 눈빛이 불길에 녹아내렸다. 5월 1일 새벽까지 집회준비를 하고 오전에는 선전을 하고 집회 앞풀이 풍물판에서 북을 치던 동지가 집회 시작과 더불어 불을 달고 뛰어온 것이다.

그리고 안동대에서는 분신배후 수사가 벌어졌다. 있지도 않은 분신배후를 조작하지 못하자 안기부는 조직사건을 조작했고 12명이 구속되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더럽혀진 동지의 명예를 회복하고 동지의 죽음을 더럽힌 이들을 징계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삶을 살고 아름답게 죽어간 동지들의 명예를 되찾는 것은 비단 과거를 회복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될 우리 역사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나가는 첫 출발점인 것이다.



열사가 남긴 글 -


90년 전태일 열사의 묘역을 다녀와서 인문대학생회 회지에 기고한 글


형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왔습니다. 이제야 참었던 그리움을 잊고져 당신의 무덤 앞에 서 있습니다.

울고도, 소리도 지르고 당신을 위한 그날이 오면도 부르고 싶습니다.

당신이 노동법을 공부할 때 그렇게 부러워 했던 대학생이 되어서

당신같은 노동자에게 세상에서 천대받는 노동자 앞에,

고개 숙여 무릎 꿇어 당신에게 소주 한 잔 따르렵니다.

가식으로 일관된 지식인으로 당신의 노동, 당신의 고통을 이해하려 했던 저를 꾸짖어 주십시오.

나의 생활이 너무도 평화롭기에 행여 당신의 존재를 망각할 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형, 형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태일이 형!

여기 모란공원에 묻힌 지도 20년, 제 나이도 스무살

그토록 많은 시간이 흘렀건만 형이 외친 노동악법 개정은 고사하고

아직도 나이 어린 우리 형제들이 저임금 장시간 지옥같은 노동환경 속에서

산업재해에 시달리며 시름시름 병들어 죽어가고 있답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형이 외친 간곡한 절규는 어디로 갔나요.

누가 형을 한스럽게 죽게했는데

그 사람들은 지금도 옥좌에서 기름진 음식을 처먹고 있는데

왜 아직도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은 오지 않는 걸까요.

아! 태일이형.

11월 13일이 해마다 오겠지요. 해마다 형을 추모하는 집회가 열리겠지만

민중이 깨어나 투쟁하지 않는 한 형의 목숨하고 바꾼 그 목소리는

흐르는 강물에 뼈가루를 날리듯 공허한 메아리로 남을 것입니다.

안동대 교내에 가묘(안동대에서 기념식과 추모제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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