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당시 21세

박종철-당시 21세

박종철(당시 21세)

1965년 4월 1일 부산 서구 아미동 출생
1983년 2월 혜광고등학교 졸업
1984년 3월 서울대 언어학과 입학
1986년 4월 11일 ‘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에 참가하여 구속
1986년 7월 15일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으로 출소
1987년 1월 13일 치안본부 대공분실요원에 의해 연행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폭행으로 운명

- 제 88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1987년 1월14일 꽃다운 한 젊은이가 죽었다. 그러나 박종철 동지의 죽음은 또다른 삶이었다. 1919년 3·1운동에서의 유관순이 그러했고, 1960년 4·19혁명에서의 김주열의 죽음이 그러했듯이. 박종철 동지의 육신은 죽었으나 온 국민의 가슴속에 살아 났고 온 국민의 분노속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다. 6월항쟁은 박종철이 온국민의 가슴속에 지른 불씨가 활활 타오른 것이었다. 

박종철 동지는 서울대 언어학과에서 학생회장을 맡아 중심적으로 학생활동을 전개해 왔고 신당동 가두시위로 징역 10개월(집행유예 2년)을 겪으면서도 민주화의 실천 의지를 굳게 지켜왔던 사람이다. 87년 1월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 의해 연행되었다. 당시 박종철 동지는 86년 청계피복노조합법화요구시위로 구속되어 재판 끝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감옥생활에서 풀려나 있었다.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받고 있었던 박종운(사회학과 졸)과 뜻하지 않게 연락이 되어 여러 동료 선후배들과 함께 만나보는 자리가 만들어졌고, 이것이 소문이 나서 경찰은 박종운을 잡기 위해 박종철 동지의 주변을 감시했다. 이러한 경찰의 주시속에 박종운과의 재차 교류가 있었고 커다란 역할을 하였으나, 한달 남짓 박종철 동지를 주시하던 독재경찰은 야만적인 고문방법에 의존하여 학생운동의 씨를 말리려 하였다. 

14일 오전 11:20분 물고문, 전기고문을 받았고, 11:45분경 중앙대 용산병원에 옮겨졌는데 의사가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학생, 노동자, 민주 인사들의 고문의 산실로 공공연히 알려졌던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의 고문에 의한 치사사건이라는 데서 분노를 크게 일으켰다. 경찰은 초기 발표에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터무니 없는 얘기를 하며 발뺌을 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간 출혈의 흔적과 사타구니, 폐 등이 엉망이 되어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 등이 들렸다는 사실에 근거해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치안본부는 물고문에 의한 것이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물고문 가담자는 조한경 강진규 2인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부영 전민련 상임의장은 영등포교도소에서 조한경과의 대화를 통해 고문진상의 축소조작을 밝혀냈다. 천주교 정의평화구현 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5.18 미사에서 고문진상의 은폐를 밝혀내고 반금곤, 황정웅, 이정호 등 3인의 추가가담자를 발표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1월16일 오전 8:00시경 가족의 허락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시신을 화장해 버림으로써 증거인멸을 도모했다. 나아가 87년 2월7일 박종철 열사 국민추도회를 원천봉쇄하고 강압과 왜곡을 반복했다. 결국 치안본부는 고문진상 은폐, 조작을 인정했다. 하지만 은폐, 조작이 당사자들의 입맞춤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교도소 면회기록은 박지원, 유정방, 박원택등 치안본부 지휘라인의 체계적인 은페노력이 있었음을 드러나게 하였다. 그리고 조한경 강진규를 회유하려던 2억원 입금통장의 실체도 드러났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은폐조작 지시사실도 인정되었다. 범국민적인 투쟁의 결과 이와 관련한 재판에서 중요한 판결이 나왔다. “원고들의 인격적 법익이 침해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위 피고들 및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에게 이로 인한 伸怨權(신원권)이란 법리를 판례를 하였다. 재판부는 「당시 피고 경찰수뇌부가 원고에게 진상 은폐함을 풀 권리(伸怨權)를 침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무자비한 고문살해에 연이어진 계속된 은폐조작은 모두 내무부, 치안본부, 안기부, 보안사, 검찰등이 모인 ‘관계기관 대책회의’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 위에 전두환이 있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속보이는 거짓말은 온국민을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이에 그치지 않고 4.13 호헌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자신의 종말을 향해 질주하였다.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은폐조작 및 호헌선언 반대 범국민대회’를 열었고, 이를 통해 전두환 군사독재 지배체제의 엷은 그물이 산산조각나게 되었다. 전두환정권의 폭력성, 기만성, 막무가내는 마침내 6.29 항복선언으로 끝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박종철 동지의 희생과 온 국민의 떨쳐 일어섬이 있어 승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의 진행은 민주진영의 자만과 분열에 의해 다시 수구세력이 복권되는 결과로 귀결되고 말았다. 민중주체의 민주주의 운동이 민중주체의 국민적 정당운동으로 승화되지 못함으로써 좌절과 실의의 6월항쟁 10주년을 경과해야만 했다. 수구세력의 기도만 욕할 것이 아니다. 무력하게 야당의 분열만 탓할 것이 아니다. 조국통일의 대장정과 21세기의 비젼을 향해 나갈 스스로의 힘의 부족을 탓해야 한며 이 약점을 극복하는데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과제이다. 



동지가 남긴 글 

- 편 지 아버지, 어머니. 더운 날씨에 비는 오지 않고 높은 하늘은 틀린 일기예보를 조롱이나 하는 듯이 연일 쨍쨍 내리쬐는군요. 꽤 더운 편이지만 그럭저럭 견딜만 합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비취파라솔 밑에서 선글라스 끼고 한가하게 피서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먹고 잘 놀아서 피둥피둥 찐 살을 빼느라고 사우나탕, 헬스크럽 다니면서 땀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삼복 더위에 라면으로 끼니 때우며 먼지와 기름 냄새로 가득찬 무더운 작업장에서 묵묵히 땀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노동자들에 비하면 저는 신선 놀음입니다. 가족들의 그런 태도는 여기 갇혀 있는 저에게는 진정으로 위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딴 가족들은 면회오면 어떻게든 꿋꿋하게 지낼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고 바깥 소식들을 전해주고들 하는데 허구헌날 판사님 앞에 고개 숙여라, 판사가 무슨 내 할아버지라도 됩니까. 저들이 비록 나의 신체는 구속을 시켰지만 나의 사상과 신념은 결코 구속시키지 못합니다. 저를 포함한 수많은 노동자, 학생들이 구속되어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누가 우리를 구속시켰습니까. 저들을 미워합시다. 그리고 저들이 저들 편한대로만 만들어 놓은 이 땅의 부당한 사회구조를 미워합시다.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할 용기가 없다면 마음 속으로 진실하게 믿는 용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구속되어 있는 사실을 왜 쉬쉬합니까. 한명에게라도 더 이러한 부당한 현실을 알리십시요. 내가 왜 구속되었는가를, 저들의 폭력성을, 우리들의 정당성을 사회적으로 고발하십시요. 

그럴 용기가 없으면 마음 속으로나마 바깥에서 오늘도 열심히 싸우고 있는 우리 친구들과 저처럼 싸우다 갇혀 있는 친구, 선배들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라도 쳐 주십시요. 엄마 아버지의 막내는 결코 나약한 인간이 아닙니다. 이만 줄입니다. 

칠월 팔일 막내 <박종철 동지가 옥중에서 부모님께 드린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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