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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정보

유인식-당시 24세

유인식-당시 24세

유인식(당시 24세)

1963년 7월 인천에서 출생
1982년 고려대학교 철학과 입학
1985년 노동현장에서 청년회 운영위원으로 활동
1986년 샘터교회 청년회 운영위원으로 활동
1987년 한국기독노동자 인천지역연맹 대표자회의 성원, 6월 대투쟁 적극 참여
1987년 8월 1일 샘터교회 노동자들과 함께 인천지역 노동자 여름수련회 체육부장으로 참여. 동료를 구하고 운명

유인식 동지는 직장없이 하루하루 일거리를 찾아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가시던


부모님 사이에서 2남1녀중 막내로 태어났고, 그후 철도노동자로서 자신의 직업을 가지셨던 부모님 아래서 살아왔다.


어렸을 때는 개구쟁이에 말썽꾸러기, 느림보라는 별명이 붙었고 국민학교 시절 부잣집 아이가


짝궁을 하기 싫다고 자리를 옮겨갔을 때 자신은 그때부터 계급적 분노를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고 술회했다.


그는 연구반 활동을 통해서 과학자가 되고 싶어 했고, 늘 부모님께는 대화를 하려 했던 총명한 아이였다


중학교 시절 학습에 열중하는 친구들을 보며 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교과서에만 치중해야하는가라는 고민을 하면서,


마치 국민학교는 중학교를 가기 위해서, 중학교는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서, 고등학교는 대학을 대학은 직장,


직장생활은 결국 죽음으로 이끌기 위한 교육이고 인간에게 보다 참다운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 시절부터 시(詩)를 통해 자기의 삶을 표현했다.


동지는 중학교 시절 “미지”라는 시에서 이런 심정을 표현했다.


“아무에게나 누구에게나 종이배를 띄우고 싶소. 누런 황금벌판의 수확 속에 넘치는


인고의 결실을 온 세상 사람에게 그 깊은 의미를 전달하고 싶소“ 이는 어렴풋이 삶에 대한 심증을 노래한 것이다.


동지는 철학과 문학에 심취했고, 고교시절 그동안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인간의 정치, 경제, 문화적 활동을 다시 한번 재정립하기 시작하면서 그 당시 이런 고민을 했었다.


삶의 목적은 인간에게, 인간 스스로에게 이러이러하게 살겠노라는 의지임을 깨달은 후에 사회과학을 통해서


휴머니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당시의 사회적 혼란을 경험하면서 이 땅의 젊은이가 가졌듯이


착취와 무질서, 폭력이 없는 사회를 갈망했다. 동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광주 민중항쟁을 보면서 많은 고민을 했으며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실된 삶인가에 대해 주위의 친구들과 같이 고민하면서 학습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서 사회과학 공부를 시작했다. 또한 문예반 활동을 통해서 시대의 아픔을 시로써 표현했었다.


대표적인 시로는 “어둠 그리고 사슬” “부자와 도둑놈” “몸부림 1,2” 등 다수가 있는데


광주 민중항쟁에 대한 아픔과 고민을 시로 표출했다. 답답한 고교시절을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극복해 나가면서


대학에 진학함으로써 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82년 고려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1학년1학기 때 학내 써클에 가입해서 고교시절부터 생각해왔던 민주화의 대열에 앞장섰다.


학교내에 경찰이 진주하고 학내 집회조차 열기가 힘들었던 1, 2학년 시절을 보내면서


한반도의 상황속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계속 했으며,


이때부터 유인식 동지는 노동자의 아픔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곤 했다.


결국 노동자의 삶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함을 강하게 의식하면서 현장생활을 준비하였고,


1985년 구로공단 내 금속공장에 들어갔다. 현장생활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삶을 배우고,


이 땅의 노동자는 뭉쳐야 하며 그럴 때 노동자들은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고


이 땅의 주인으로서 일어설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입사한지 몇 개월 후에 신분이 드러나서 공장을 나와야만 했다.


그 후 1986년 9월부터 인천대 앞에다 사회과학 전문서점 “밀물”을 운영하며 인천에서의


또다른 현장생활을 준비했다. 서점을 통해서 많은 후배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었으며 서점을 하면서


86년 7월말 샘터교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8월초부터 십정동 노동청년들을 모아 노동자는 누구인가,


노동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리고 노동운동, 한국의 역사 경제 정치상황 등에 대해 밤새워 토론하고 학습을 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노동청년들이 자기 삶에 대해 고민하고, 보다 올바로 살기 위해 고민했으며,


앞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의하였다. 87년 2, 3월 박종철 추모기간에는 같이 공부한 노동청년들과 거리로 나가


군부독재의 만행을 폭로하는데 앞장서서 싸워 나갔으며 노동청년들의 정치의식을 일깨우는 데 헌신하였다.


87년 5월 그동안 같이 고민했던 노동청년들을 모으고 좀더 많은 대중들을 모으고자 샘터교회 청년회를 만드는데


노력했으며 실제적으로 홍보부를 맡아 운영해 나갔다. 87년 6. 10일 국민 평화대행진 때


누구보다도 앞장서 헌신적으로 싸웠으며 계속 6.18, 6.26 가두시위 때도 노동청년 회원들과 더불어 선두에 서서


군부독재의 기만성을 폭로하는 데 앞장서서 싸웠고 주위의 동료가 경찰에 잡혔을 때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뛰어가 구출해 내고는 하였다. 87년 7월 양심수 전원 석방 촉구대회에 참여하였고,


그 후 답동성당 농성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직접 각목을 들고 경비를 서는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앞으로의 투쟁방향에 대해 토론할 때에는 노동자의 입장을 관철하는데 헌신적으로 임했다.


87년 7월말 수련회 실무위원회 조직부원으로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으며 수련회에


가서도 조직부의 생활부장으로서 보다도 같이 간 노동청년들과 같이 토론하며 놀기를 더 원했다.


사고가 나자 동료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 멀리서부터 뛰어왔으나 자신이 수영을 못한다는 것을 알고


사람과 사람의 손을 연결하여 최선두에 서서 동료를 구하려고 하였다. 결국 동지는 자신의 안녕보다는


노동자들의 슬픔을 더욱 깊이 생각했으며, 또한 이 땅에 존재하는 불합리한 모습들을 개혁하고자 몸부림쳤고,


고인이 되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보다는 동지를 더욱 사랑했던 것이다.

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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