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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세월호 - <업사이드 다운>

다시, 세월호 - <업사이드 다운>

글 성지훈/ acesjh@gmail.com​​​​​​

 

지난 3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쫓겨났다. 쫓겨났다는 표현이 옳다. 누구의 말처럼 유사이래 단 한 번도 민중의 힘으로 권력을 징치해본 일 없는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민중들의 분노가 대통령을 쫓아내는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냈다. 대통령이 쫓겨나던 밤,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그렇게 세상이 다 좋아질 것 같았던 춤과 노래가 끝났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 바다엔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남았다.

 

# 뒤집힌 세상
<업사이드 다운>은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2014년 참사 이후 세월호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여러 편 제작됐다. <업사이드 다운>은 그 중 가장 차분한 태도를 보인다. 슬픔을 조장하지 않고 분노를 강변하지도 않는다. 과잉된 분노와 슬픔 대신 영화가 선택한 것은 ‘직시’다. 그날과 그날 이후에 대한 직시. 업사이드 다운은 ‘뒤집히다’라는 뜻이다. 뒤집힌 세월호, 뒤집힌 세월, 뒤집힌 세상에 대한 직시.

영화의 초반은 희생자의 아버지 4명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들이 유가족이라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이야기는 놀랍게 담담하다. 그들은 아이들의 장래희망을 이야기 하거나 수학여행 전날 밤의 설렘, 천진했던 학교생활을 회상하며 웃는다. 이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감독의 시선과 태도를 반영한다. 감독은 유가족의 슬픔을 전시해 관객의 눈물을 짜내려 하지 않고 무능한 정부와 위정자들을 탓하며 쉽사리 분노를 추동하지도 않는다. 감독은 “지금 필요한 것은 분노보다 성찰”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영화가 희생자의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인터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감독의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 유학중이던 김동빈 감독은 참사 직후 귀국해 유가족들 곁에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영화가 공개된 건 참사로부터 2년이 지난 2016년이다. 그동안 비참과 애도, 분노를 모두 지나 온 사람들에게 감독은 그 ‘감정’들 너머에 있는 무엇을 보라고 지시한다. 무엇이 달라졌나. 우리의 슬픔은 무엇을 만들어냈나.

감독의 태도는 해양학 연구자나 정치인을 비롯한 전문가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도 유지된다. 영화는 정치적 이해나 권력과 언론의 유착에 큰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지나치게 자세하고 전문적이었던 사고 원인 분석과 그 진상을 밝히기 위한 다소 광기어린 음모에도 관심이 없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과 그 사실에 얽힌 사고를 대처하던 사람들의 ‘말’이다. 그 언어가 기반하고 있는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그 가치가 빚어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를 담담히 서술한다.

감독이 특히 관심을 둔 건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언론의 태도다. 언론의 태도는 곧 이 사건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의 바탕이 됐다.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국내 언론이 얼마나 구태의연하고 조잡했는지 영화는 가감없이 드러낸다. 생존자에게 “네 친구 죽은 거 아느냐”고 묻는 기자, 구조작업이 진행 중임에도 “사망한 사람의 보험금”을 보도하는 언론. 시청률과 클릭에 목마른 언론은 ‘관객’을 몰기 위해 추적 드라마로 둔갑하기도 했다. 결국 사회적 관심은 사건의 본질에서 떠났다. 언론이 일등공신이다.

영화가 대단히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하거나 몇 가지 의혹을 깊이 파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는 것처럼 감독은 고발보단 성찰을 방점을 찍는다.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건 한국사회가 얼마나 ‘비인간적’인지에 대해서다. 생명과 사람보다 경제적 가치, 이윤을 최우선에 두는 것이 너무 당연한 사회에 대한 성찰.

한시간 남짓의 영화는 말미에 메르스 사태에 대처하는 정부의 메시지를 보여준다. 메르스 사태를 진화하기 위해 ‘경제부처’에 대책을 요구하는 정부의 목소리는 2년 전 세월호 참사를 빚어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보여주는 셈이다. 생명보다 이윤, 사람보다 돈을 우선하는 뒤집힌 세상과 그 세상을 주조해 온 세월.

 

# 다시, 세월호
세월호는 어느 순간부터 보통명사가 됐다. 비뚤어지고 뒤집힌 이 사회를 지칭하는.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시금석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가방 한 구석에 노란 리본을 달고 있으면 ‘정의롭고 진보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세월호가 말에 덧씌워지고 ‘보통 명사’가 돼가면서 세월호에서 사라진 304 개의 우주는 단지 숫자가 됐다. 그 하나 하나가 품고 있던 무한대의 셀 수 없는 것들은 계량이 가능한 보통의 것이 돼버렸다.

여전히 세월호는 그 바다에 있다. 뭍으로 끌어올려진 건 세월호의 몸뚱아리일 뿐이다. 세월호가 끌어안고 침몰했던 수 많은 것들이 여전히 바다 안에 있다. 그리고 뭍에 있는 이들은 또 하나의 알리바이를 만들었다. 대통령이 내려가니 세월호가 떠오른다는 식의 시시껍절한 농담은 여전히 뒤집어진 세월호의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드러낸다.

울부짖고 애도하던 목소리는 3년이 지나도 잦아들지 않았지만 바꾸어낸 것은 없다. 그건 ‘세월호 7시간’이라는 모종의 보통명사까지 만들어 대통령을 쫓아낸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사람은 돈의 아래 있다. 생명이 이윤의 부속품밖에 되지 않는 세월. 분노를 과장해 거기에 편승하거나 슬픔을 애써 외면해 그를 조롱했던 이들은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슬픔을 직시하고 곧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점에서 같다. 때문에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거나 아니면 바꾸지 않았던 당신과 나는 어쩌면, 그 거대했던 분노와 애도는 변하지 않는 세월의 알리바이일 뿐일지 모른다.

세월호로부터 3년, 다시 4월이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감독이 영화의 말미에 보여준 메르스 사태는 영화의 엔딩이라기보다는 도돌이표로 돌아간 영화의 처음이다. 어쩌면 감독이 요구하려는 건 비단 세월호의 기억뿐이 아니라 그보다는 세월호라는 보통명사가 지시하는 수많은 것들이겠다.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적 삶, 생명에 대한 경외, 더 나아질 내일에 대한 상상력. 세월호에서 3년이 지나도록 고작 화내고 슬퍼하는 것말곤 아무 것도 바꾸어내지 못한다면 뒤집힌 세월호는 앞으로도 계속 그 바다에 고꾸라져 있을 것이라는 섬칫한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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