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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 세계가 부처다. 지선 스님 2

 중생 세계가 부처다. 지선 스님 2

 

중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꼭 해야 되나? 가난한 농촌에서 대학은 꿈도 못 꾸고 기껏 고등학교나 갈 텐데, 일찍 나가서 돈 버는 게 낫지 않을까? 16살, 중학교 2학년 까까머리는 학교는 다녀서 뭐하냐고 동무들을 꼬드겼다. 어차피 잘 먹고 잘 살려는 거 아니냐? 그럴 바에야 굳이 학교 다닐 필요 없이 지금부터 돈 버는 게 낫잖아? 1961년 5월 1일 밀밭에서 동무들과 머리를 맞댄 까까머리는 이튿날 교복 대신 형님의 옷을 훔쳐 입고 집을 나갔다.
장성 역에서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하던 중 백양사 가는 버스가 오기에 무작정 올라탔다. 먼저 절 구경이나 하자는 한가한 속셈이었다. 동무들과 어울려 신나게 절집 구경을 하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착 가라앉고 편안했다. 헌데, 어둠이 내리자 동무들은 집에 가겠다고 울상을 지었다. 목탁과 염불 소리가 무척 마음에 들었던 까까머리는 동무들에게 차비를 나눠주고 자신은 절집에서 살겠다고 했다. 마침 ‘혼인계’로 모았던 쌀 한 가마니를 짊어지고 나왔던 터라 5,800원이란 큰돈이 있었다.
초등학교 도덕책에 실렸던 석가모니의 전생담을 오래 기억하고 있던 까까머리는 그날, 동무들을 뒤로하고 백양사에 몸을 맡겼다.
분노가 시를 쓴다

1989년 7월 8일 새벽 5시 문빈정사에서 참선 중이던 지선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경찰이 절집을 포위했음을 알아챘을 때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부처님께 인사도 못 하고 수갑을 차고 말았다. 도량에서 이럴 수는 없다고 항변했지만 눈엣가시 같은 수배자를 검거한 경찰에게는 씨알이 안 먹혔다. 그날로 광주 동부경찰서로 끌려간 그의 죄목은 국가보안법 위반, 집시법 위반, 공무집행방해죄, 정기간행물에 관한 법률 위반 따위였다.
“이철규 열사 고문살인 진상규명 건이었어요. 교도소에 가서 조사를 받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내 뒷조사를 해 놓은 서류가 산더미야. 먼지가 풀풀 날리는 것까지 죄다 가지고 왔는데 하여간 엄청 났어. 거기서 한 달이나 조사를 받았는데 아주 징글징글했어요. 초장부터 검사하고 기싸움 하면서 대판 붙어버렸지.”
포승줄에 묶인 채 검사 방에 들어섰는데도 등을 보인 채 검사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책상에 발을 올려놓은 채 담배를 피우면서 창밖만 내다보았다. 그 자세로 30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회전의자를 돌린 검사가 소리쳤다. “당신이 중이야? 땡초야, 사람새끼야 뭐야! 절집에 틀어박혀 목탁이나 두드리지 데모나 해 쌓고 말이야. 당신 빨갱이지?” 
묵묵히 서 있던 지선은 느닷없는 검사의 호통에, 아, 이놈이 사람 기를 죽이려는구나, 직감하고 곧바로 되받아 쳤다. “야이, 검사영감새끼야, 이 상놈의 자식아! 낫살도 새파란 놈이, 넌, 애미 애비도 없냐? 니 부모가 불쌍하다, 자갈논 팔아서 기껏 검사 만들려고 했더냐? 노태우 똥구멍이나 핥으라고 공부 가르쳤더냐? 검사란 놈이 스님한테 욕이나 하고 말이야. 학생들하고 노동자들이 의문사를 당하는 이 죽임의 시대에 총칼잽이가 나와서 춤추는 시대에 중이 염불이나 외우고 있어야 되겠냐? 니가 검사야? 호로 새끼야, 네깟 놈이 무슨 얼어죽을 검사야!” 지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입이 딱 벌어진 검사는 낯이 새파래졌다.
“이런 개자식한테 조사 안 받아!” 그 길로 지선은 검사 방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서류더미에 머리가 지끈댔던 지선은 속이 다 후련했다. 여태껏 살면서 주워들은 욕이란 욕은 다 퍼부은 뒤였다. 검사와 기싸움을 했던 그 재판에서 지선은 6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1988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의 죽음이 알려졌을 무렵 지선은 수배 중이었다. 노동현장과 대학의 집회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바람에 팔다리가 붓고 온몸이 엉망이었다. 경찰을 피하느라, 창원대에서처럼 쓰레기를 담은 트럭에 묻혀 학교를 빠져나오기가 예사였다. 그때쯤부터 정부는 지선을 빨갱이로 몰아갔다. 6월항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사관이 “당신이 중이야 뭐야?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그래? 내란이 일어났는데, 중인 당신이 설쳐서 그렇잖아. 이 나라를 망쳐먹으려구 작정한 거야 뭐야?”라고 퍼부으면, 지선은 “이 중이 여기까지 온 까닭을 차분히 따져보라.”고 답했다.
“당신 빨갱이지?”, “아니다. 나는 무슨 주의자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도 안 해봤다. 나는 모른다.”, “그럼 당신은 무슨 주의자야?”, “나는 민족민중이 이익이 되기를 바라는 주의자다! 
국민이 원하는 세상, 국민의 뜻을 받드는 지도자, 국민이 원하는 대로 돼야 좋은 세상이다.”, “자생적 빨갱이군! 스님이 이럴 수 있나. 자비로운 게 종교인데 투쟁할 수 있나 말이야?”, “호국불교다.”
지선을 욕하기는 경찰뿐만 아니라 신도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는 곳마다 “승복만 입은 죽은 자의 몸속에 사는 벌레다, 불교를 망치려는 가짜 승려.”라고 손가락질했다. 종단의 큰스님들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찼다. 사회의 민주화와 불교개혁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던 지선은 하루아침에 천하의 죽일 놈이 되었다. 그럴수록 지선은 신도들이나 스님들이나 종단을 떠나서 오로지 부처님 말씀만 떠올렸다. ‘호법신장’이 되어야겠다, 나라를 구하고 인권을 신장하고 사회를 민주화하고 민족통일에 앞장서자고 다짐했다.
한뎃잠으로 몸마저 망가져 가던 지선은 갖은 수모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 무렵 지선은 한국 불교는 왜 불의에 맞서지 못 하나?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여러 기관에서 오는 협박 전화에 시달리던 참이었다. 그럴수록 지선은 ‘목숨을 내놓고 하자!’고 결심했다. ‘발에 돌을 묶어서 물에 처넣어 죽이겠다.’ 라든지, 이따금 한밤중에 도둑이 들었고, 생명의 위협을 숱하게 느꼈다. 그래서 지선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늘 신변을 깨끗이 했다. 상좌들한테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정리를 잘 해두라고 일러두었다.
“불교 신앙심이 나를 버티게 했지요. 의인의 길은, 불교 정법을 수행한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비난을 받았고 소외를 당했어요. 수모는 불쌍한 자비심으로 감싸야지 사람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선을 행하여도 상대가 나를 원수로 보기 십상이지요. 선악 시비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에 젖어서 나오기 때문에 당할 때는 분노가 솟지요. 하지만 분노가 시를 쓴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과 놀이 수행이 하나다
“집에서 죽을 끓이는 놈은 나가서도 죽을 쑤더라고, 절집도 일이 엄청 났어요. 행자(예비 승려) 생활을 하는데 날마다 밀어닥치는 관광객하며 전국에서 수학여행 오는 남녀 학생들이 수천 명이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무슨 레저 시설이나 관광코스가 있는 게 아니어서 봄, 가을이면 관광객이나 학생들 수학여행이 사찰로 몰렸지요. 쌀 한 되만 가지고 오면 절에서 먹여주고 재워줍니다. 절은 있는 방 없는 방 모두 비워서 하룻밤에 6,7백 명을 받을 때가 허다했어요. 밥장사로 절집을 운영하니 오죽 일이 많았겠어요. 일이 몸에 배지 않았다면 하루도 못 살고 도망갔을 겁니다. 아침 일찍 큰 밭에 나가 무, 배추 뽑아다가 김치 담그는 일부터 시작해서 밥 짓고 밥상 나르고 청소하고 또 손님 받고, 허구한 날 그랬으니 온몸이 녹초가 됐지요. 
그에게 깨달음은 무엇일까. 1989년 이철규 열사 사인 진상규명 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지선은 0.75평 독방에서 참선을 하였다. 사람이 누우면 그대로 꽉 차는 방이었다. 지선은 부처님이 절호의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굳게 먹었다. ‘다른 사람이 몇 십 년 산에서 참선한 것을 여기서 하자!’고 독하게 맘먹고 ‘참선하다 여기서 죽자!’, ‘깨닫고 나가자!’고 다짐했다. 밤이나 낮이나 참선 자세로 그대로 있으니까, 교도관들이 힐끔힐끔 구경했다.
“그때가 요즘 6년 선방에서 지낸 것보다 훨씬 더 좋았어요. 절박해서 그런지 참선이 잘 되었지요.”
지선은 무념무상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두 세 시간이 담배 한 대참처럼 금세 흘러갔다. 0.75평은 양쪽 벽이 닿는 느낌이 들었고, 변소만 빼면 눕기도 힘들었다. 지선은 숟가락으로 벽에 만(卍)을 파놓고 앉아서 정진했다. 참선이 갈수록 잘 되었다. 앉아 있는 것인지,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엄청난 기쁨이 몰아쳤다. 생명의 에너지가 온몸에 충만했다. 만물을 창조하는 생명의 본질을 맛보았다. 불생불명의 에너지에 흠뻑 젖었다. 그 좁은 벽이 탁 트이고 널따란 운동장에 있는 기분이었다. 천지기운과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처음 독방에 갇혔을 때는 관에 들어앉은 듯, 미라가 된 기분이었고, 갑갑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3일이 지나자 엄청난 충만한 에너지가 몰아쳤고, 기쁨에 사로잡혔다.
수행승 지선은 감옥 안에서 오랜 숙제를 풀었다. 첫째, 수행승이 현실에 참여해야 하는가? 둘째, 개인의 구원과 사회구원을 동시에 할 수 있나? 셋째, 종교적 교리가 사회운동에 적합하나? 그는 세 가지 의문이 다 가능하다고 보았다. 다만 그것을 이루자면 지도자가 있어야 했다.
“부처님의 활동은 우주 전체지요. 처처에 부처요, 중생 세계가 부첩니다. 10여 년 동안 민주화운동하면서 고민했던 세 가지 문제들을 6·10항쟁 때에 조계사 앞에서 천도재를 지내며, 이철규 열사의 의문사에 대한 진상을 밝히다가 잡혀갔을 때 감옥 안에서 참선하며 의문을 풀었어요. 즉, 무등민족문화회의 3가지 슬로건(민족과 함께, 민중과 함께, 역사사회와 함께)이 맞아떨어졌다고 봤지요. 이 시대에 내 역할을 작은 위안으로 삼고, 이게 인생이로구나 하고 받아들였지요. 일과 놀이와 염불과 독경과 멋과 삶의 모든 과정이 여일하게 진선진미할 때, 그것이 모두 선(禪)입니다."
 

통일이 안 되면 모든 게 반쪽

지난 8,90년대 민주화운동을 되돌아보면 지선은 아쉬움이 많다. 첫째, 지도자가 없었고, 둘째, 수입된 이론을 현실에 그대로 대입했고, 셋째는 모험주의. 우리 운동은 지나치게 학생운동 위주였다. 그리고 운동단체가 하나로 결집했어야 했는데, 그걸 못 했다. 제국주의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 ‘분열하라, 지배하리라.’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우리 운동이 오늘 이 세상을 만들었음을 그는 높이 산다. 무엇보다 그가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은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변신이다.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권력을 쥐면 함께 했던 과거의 동지들을 따돌린다. 반면에 수구세력은 아량이 있다. 생각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배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자신도 오래 권력을 누릴 수 있음을 그들은 알기 때문이다.

지선은 북한 보현사 법회에서 남북 모든 민중들에게 밥이 되는 이념이 바로 통일이라고 강조했다. 분단이 계속되는 한 문학이나 철학, 학문 모든 게 반신불수이고 온전하지 못 함을 깨달아야 한다. 빈익빈 부익부 문제만 하더라도 정치가 해결해야 하는데 손을 놓고 있다. 분단 때문에 민생문제가 밀려났기 때문이다. 국방비를 1년만 안 써도 아파트 2백만 채를 짓고 의무교육도 할 수 있다.
이렇듯 지선은 남한 사회에서의 삶을 불안하게 여긴다.
청년, 학생, 노동자, 농민, 양심적인 세력들이 독재정권과 싸워서 권위주의를 물리치고 오늘의 사회를 이룩했다. 하지만 지금은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다. 정권교체를 서너 번은 해야 민주주의사회가 될 것이고, 그 지름길은 바로 통일이다.
“옛날 전두환이 같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다든지 하는 더러운 세상이 오면 몰라도 나 같은 사람이 설칠 필요가 없어요. 수행승이 보조역할만으로 만족해야지요. 물 묻은 바가지에 깨 달라붙듯이 민주화운동은 대중성이 생명입니다.”
 
선방으로 가다

1999년에 위암 수술을 한 지선은 몸과 마음으로 할 일을 다 했음을 알고 있다. 수행승인 그는 요양 중이다. 그에게 인류의 역사는 종교(제사장)와 권력(왕권)이라는 두 축이 맞물린 수레바퀴이다. 종교와 정치는 일란성 쌍둥이이고 정치가 못 하는 것을 종교는 해낸다. 자본의 꽃을 종교로 보는 지선은 우리 사회에서 불교 빼고는 지배세력에 속한다고 본다. 자본이 물질과 정신세계를 지배하는데, 영혼까지 지배하는 게 종교다. 꼭짓점이 셋(종교, 권력=정치, 민중)인 세계역사를 보라. 권력은 종교를 움켜쥐고 민중을 다스린다.
“우리 사회의 권력은 오래 전부터 불교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지요. 하지만 불교는 희망적이지요. 밑에서부터 혁명을 완수할 수 있는 종교입니다. 불교는 영구혁명론의 종교지요. 영원한 진보입니다.”
요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웰빙(참살이) 바람을 그는 어떻게 볼까. 돈 없는 사람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웰빙은 뜬구름 잡기요, 거짓일 따름이다. 그것보다는 내가 행복해지려면 너도 행복해져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기를 지선은 바란다. 시멘트로 건설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약육강식의 포로가 되었고 짐승으로 변해간다. 욕망에 눈멀기보다는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겨울밤을 그려 보라. 아침에 안개에 잠긴 초가집을 지나 고샅길을 걸어 보라. 그리고 보리밭, 밀밭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어 보라. 그것은 인간이 인간의 본질을 찾아가는 시간이다. 자연의 품에서 인간은 비로소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음이다. 
“ …… 시간은 흘러 저녁이 되고 하던 잡담도 바닥나고 침묵 속에서 밤도 깊어갑니다. 검게 그을린 석유등잔에 불꽃도 가물가물, 밖에서 내리는 함박눈과 함께 나풀거립니다. 지르륵쿵, 지르륵쿵, 장단 맞추듯 보두질 바늘대질 소리는 두 사람의 마음을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음악소리입니다. 처음에는 이 가마니를 장날에 내다 팔면 돌아올 때 지게에다 홍어속(홍어의 내장) 한 마리 분을 매달고 와서 맛있게 비빔밥을 먹어야지 하고 생각하다가는, 언제 가마니 짜는 일 좀 그만하고 부자가 되어 편하게 사나 하는 생각을 하지요. 시간은 흘러가 밤중을 넘기고. 그때야 일손을 놓고 소외양간처럼 검불이 가득 찬 죽석방(대껍질로 짜서 만든 자리) 위에 쓰러져 잠이 들지요. 그리고 다음날, 또 그렇게 지내고 ……”
 

지선스님 연보

1946년 전남 장성군 삼계면 상도리에서 출생

1961년 백양사에서 김석산(金石山 尙玄)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72년 영광 불갑사 주지

1976년 조계종 제 23교구본사 관음사 주지

1984년 `무등`지 발간 시작

1985년 광주 무등민족문화회 의장, 민중불교연합회 지도위원

1986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10인)

1987년 6.10항쟁 주도로 투옥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중아우이원, 조국통일위원

1990년 불교정토구현 전국승가회 의장

1991년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공안통치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공동의장

1991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공동의장

1992년 국가보안법철폐범국민투쟁본부 상임의장

1993년 전국불교운동연합 상임의장

1994년 전국구속수배 해고노동자 원상회복을 위한 지원대책위원회 공동대표

1994년 조계종 제 18교구본사 백양사 주지

1995년 실천불교 전국승가회 공동의장

1997년 민족화합 불교추진위원회 상임추진위원장

2000년 현 고불총림 백양사 운문선원 정진 중

2004년 (사)실천불교 전국승가회 이사장 

 

글 / 윤 동 수 

1960년생
 1990년 사상문예운동 겨울호에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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