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승필-당시19세
1972-04-15 ~ 1992-11-02
“폭력만행 민생파탄 주범 노태우 정권 퇴진 및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 시위 도중 연행되어 구속되기도 했던 동지는 집행유예로 출소한 이후 YMCA 회장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91년 7월 부친이 지병으로 별세한 이후 경찰로부터 계속된 협박 전화가 결려왔고, 이에 동지는 몹시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리던 10월 14일 밤늦게까지 후배들을 만나 헤어진 이후 행방불명 되었다. 그리고 11월 2일 경찰로부터 집으로 문승필 동지가 기차 사고로 죽었다고 연락이 왔다.
경찰 측은 15일 0시 55분경 농장다리에서 문승필 동지가 기차에 갑자기 뛰어들어 자살했고 그 후 시신을 광주 보훈병원으로 옮겼고 신원확인이 잘 안되어서 17일 만에야 파악하고 11월 2일 집에 연락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동지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다.
1) 시계, 라이터, 담배(2-3개비), 전화카드, 현금 1000원, OMR카드가 현장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유품이 너무 깨끗한 점.
2) 기차에 치여 죽었는데 시신의 외상이 너무 적고, 안경이 왼쪽 알만 금이 간 채 별 손상이 없는 점.
3) OMR카드에 주소가 적어져 있었는데 OMR카드를 11월 2일에야 발견한 점.
4) 신원파악 과정을 2명의 형사가 달리 이야기 한 점.
- 강력계 형사 : 지문 채취를 해서 컴퓨터에 입력해도 안 나타나 서울 경찰청에서 확인했다.
- 담당형사 : OMR카드(11월 2일 발견)에 주소가 있어서 연락했다.
5) 유서가 없는 점.
6) 선배, 후배의 만남이나 어머니와 생활에서 자살 기미를 전혀 못 느낀 점. “아니야, 절대 우리 애기는 그럴 애기가 아니란 말이여. 누가 죽여 놓고 갖다 놓았을 거야. 학생, 제발 우리 승필이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줘. 이대로 보낼 순 없어.” (울부짖는 어머니)
7) 부친상 이후 집이 어렵게 되자 형사로부터 계속 전화가 와서 괴로워 한 점.
동지가 남긴 글
5. 24
호준이, 아침 조회시간에 요즘 얼굴보기 힘들구나.
5월 중순이다. 내일이 숭희형의 장례식이 있는 날이고,
많은 4천만 애국민중이, 진정 이 나라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싸워나가는 많은 전사들이
쓰러져가고 있다.
5. 29
오랜만에 내 노트를 접한다. 기분이 묘하다. 사람은 항상 변화발전한다고 들었다.
어떤 사람은 변화, 퇴보도 하겠지. 하지만 난 그것을 거부하고 싶다.
퇴보는 있을 수 없다. 후퇴는 있을 수 없다. 화가 나 죽겠다. 성질나 죽겠다.
요즘의 나의 마음을 추스수 없을 정도로 걷잡을수 없다.
대하한테도 미안하고, 나를 아는 여러사람들한테도 미안하고, 한편 진짜 화난다. 글이 횡설수설하다.
오늘 집회숫자가 증말 10원어치 모였다.
어떤 사람들은 웃으면서, ‘많이 모였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오랜만에 교투한다고 몸도 푼다.
그런 모습들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모든 일이 내가 바라던 대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데로 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땅의 자주, 민주, 통일을 생각한다면, 아니 이 땅의 청년학도 이다면, 우리의 후배들의 선배라면 응당 청년학도다운 모습들, 선배다운 모습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결코 뻔뻔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또다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닐까. 경대의 죽음을, 승희 죽음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슴 절절히 느끼고 싶다. 박창수씨의 그 처참함, 철수의 그 모습. 그리고 느끼게 해야 한다.
지금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지만 그 방법을 모르겠다.
어제 승환이, 송이에게 내 감정을 드러냈다. 다시 한번 나의 결의를 다진다. 수도 없이 다지겠다.
통일진군 47년 5월 29일
동지를 생각하며
동지가 구속 중에 있을 때 동아리 날적이에 동아리 사람이 써 놓은 글
백두오르기 47년 칠월 열하루
너를 동아리 방에서 보지 않은 지 41일째 되는구나.
너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도 꽤 오래된 것 같고 공백은 채워져 가고
네가 채웠어야 할 골백만 동아리방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나.
그동안 건강 소식은 면회투쟁을 전개했던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들었다.
어떤 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단다. 감옥은 나의 가장 편안한 휴식처라고…
하지만, 뒤집어 놓고 생각해 보았을땐 많은 역량손실을 낳기도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수인의 모습이 되었을 때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얼마 전에는 우리투쟁의 구심인 “공안통치 분쇄와 민·정수립을 위한 국민회의”의 한상렬, 이수호 의장이
백만 청년학도의 부주의와 무성의로 인해 적들에게 포로가 되어 버렸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백만 청년학도의 투쟁의 구심 전대협 회장님과 조통위위원장님을 비롯한
여러 전대협 간부들이 또한 수인의 모습이 되었으며 적들의 간악한 흉계에 말려
5,6월 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강경대 열사, 열사의 아버님이 또한 적들에게 잡혀있단다.
현재로서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길 없구나.
허나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워진다는 말을 믿으며 또한 현재 민족해방구국투쟁의 현장 곳곳에서
열심히 싸우고 계시는 동지들을 믿으며 힘차게 살아볼란다.
광주를 해방의 도시로 만들었던 5·18 전사들과 광주시민이 존재하는 한, 그 넋이 살아있는 한,
87년 그 살벌했던 공안통치를 분쇄했던 백만청년학도와 애국민중들이 있는 한
우리는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미제국주의와 노태우 파쇼정권의 공안의 칼날이 다시한번 이리저리 미친 듯이 활개를 쳐대고 있구나.
하지만 지치지 말자. 강고한 사상적 무기를 틀어쥐고 단결이라는 함마로 적들의 정수리를 부시자.
내년 총선, 자치단체장, 대선을 앞두고 미제국주의와 노태우가
민민세력에 대해 정면도전을 해오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자명한 것 같다.
강철은 두들길수록 단련이 된다는 말을 되새겨보며 이제 맞받아 몇십배, 몇천배로 갚아주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것이 사람마음을 상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럴 때 일수록 무척 건강관리 힘쓰도록 했으면 한다.
사람이 열정만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무척 안타까이 생각하며…
91들 무척 건강하게 자라고 있단다. 마음은 항상 너와 함께이리라 믿는다.
해방 코스모스가 피기를 기다리기 전에 피워 나갈려고 노력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면회가서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