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대공분실은 건축 이후 사용 주체의 필요에 따라 1976년 설계와 달리 신축 공사 당시에 부분적인 설계 변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983년 2개 층의 수직 증축 당시에는 대폭적인 용도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초 건축물은 경찰청 보안수사대의 대공업무를 위한 시설로 지어졌으며, 박종철 고문사건 이후에도 대공업무를 수행하였으나, 2005년 경찰청 인권 보호센터로 용도가 변경되면서 고문의 현장과 시설 일부가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2018년 12월 행정안전부로 이관되었으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이곳의 관리운영 책임을 맡아 2019~2020년 임시운영 하였다. 2021년부터 리모델링 및 신규 건축 공사를 거쳐 2024년 정식 개관할 예정이다.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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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0월 29일 | 갈월동 98번지에서 갈월동 98-8번지 외 19개 필지 분할 갈월동 98-8번지 소유권 : 조선잠사주식회사(朝鮮蠶絲株式會社) |
1957년 02월 05일 | 귀속재산처리법에 의해 토지소유권 귀속 : 홍중중공주식회사(弘中重工株式會社) ▶ 국가(國) |
1975년 03월 10일 | 토지 소유권 이전 : 국가(國) ▶ 홍중중공주식회사(弘中重工株式會社) 토지 소유권 이전 : 홍중증공주식회사(弘中重工株式會社) ▶ 국가(國) 일제강점기 소유주었던 홍중중공업(주)가 토지소유주가 된 것은 정보기관이 땅을 사용하기 위한 위장책으로 판단됨 |
1976년 | 내무부 장관 김치열 남영동 대공분실 발주, 공간건축연구소에서 수주 |
1976년 6월 25일 | 토지소유권 이전 : 국가(國) ▶ 내무부 치안본부 |
1976년 10월 02일 | 남영동 대공분실 착공 |
1977년 11월 07일 | 남영동 대공분실 사용 승인 (갈월동 98-8번지 외 19개 필지) |
1977년 11월 23일 | 남영동 대공분실 리영희 (최초 고문피해자) 체포 |
1979년 11월 30일 | 남영동 대공분실 내 철근콘크리트 검은 벽돌 창고 1층(46.28㎡) 신축 |
1981년 06월 | '정보라'에서 대공과 신설 |
1983년 | 남영동 대공분실 증축 설계 및 시공 |
1985년 03월 27일 | 갈월동 98-9번지 외 18개 필지 갈월동 98-9로 토지 합병 |
1985년 09월 04일 |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사건으로 '김근태' 체포 후 23일간 구속 |
1987년 01월 14일 |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발생 |
1991년 |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경찰청 보안분실로 변경 |
1992년 07월 29일 | 건축물 및 토지소유권 이전 : 내무부 치안본부 ▶ 경찰청 |
2005년 07월 26일 | '경찰청 보안분실'이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개칭 |
2005년 08월 | 일반에 최초 공개 |
2007년 | 박종철 기념 전시실 및 경찰청 인권전시실 리모델링, 인권보호센터 설립 후 진행된 리모델링 과정에서 5층 조사실의 상당수가 변형됨 |
2008년 07월 21일 | 남영동 대공분실 내 컨테이너 샤워장 1층 (15㎡) 신축 |
2019년 01월 16일 | 건축물 및 토지소유권 이전 : 경찰청 ▶ 행정안전부 |
남영동 대공분실 증축 전 후 모습: : 1976년(좌), 1983년(우)
대지위치 | 서울특별시 용산구 갈월동 98-8번지 |
지역/지구 | 도시지역, 일반상업지역, 지구단위계획구역 (용산지구) |
대지면적 | 6,391.00㎡ |
주 용도 | 업무시설 |
건폐율 | 10.76% |
용적율 | 44.68% |
건축면적 | 387.41㎡ |
연면적 | 3,036.54㎡ |
용적룰 산정용 연면적 | 2,855.54㎡ |
층수 | 지하 1층, 지상 7층 |
최고높이 | 28.8m |
도로현황 | 동측 6m (소로3류) |
도로현황 | 12대 (장애인 2대 포함) |
구분 | 층수 | 실명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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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실동 | 7 | 관리 및 지도반, 계장실, VIP실, 단장실, 회의실, 비서실 등 | 증축 도면 분실 |
6 | 외근반, 서무반, 실장실, 연구실, 자료실, 휴게실 등 | ||
5 | 조사실 (조사실 내 화장실, 검색실) | 원도면 | |
4 | 회의실 (영사실, 전실, 예비실, 창고) | ||
3 | 직원사무실 (전실, 실장실, 실장침실, ITV 모니터실, ITV 기계실, 창고, VIP실, VIP욕실, 특수조사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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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직원사무실 (직원실, 판단관실, 교환실) | ||
1 | 서무실, 숙직실, 직원대기실, 피의자대기실, 검색실, 면회실 등 | ||
AMD동 | 3 | 반장실 | |
2 | 305작업실, 숙직실, 305분석실, 서류창고, 사진실, 암실, 통신 암호북석실, 방송방탐통제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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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서무실, 숙직실, 전시실, 창고, 기계실, 정비실, 예비실 | ||
부속동 | 2 | 식당, 창고 | |
1 | 배전반실, 펌프실 | ||
지하 | 기계실, 고압발전실 |
경찰청으로부터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한 오래된 기록들은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부속동의 보일러실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 있던 도면과 건축 관련 자료들이 2019년 초에 발견되었다. 누군가 일부러 남겨둔 것인지, 그저 버려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제 남영동 대공분실은 치안본부 대공분실, 경찰청 보안분실, 경찰청 인권센터를 거치며 덧입혀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건물 곳곳에 옹이처럼 박혀 있는 아픈 시간과 기억을 넘어, 이곳을 민주주의가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기념하는 일은 이제 시민의 손에 맡겨진 숙제가 되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서울의 중심 용산구에 위치해 있지만 서측으로는 철도가 지나가고 남측으로는 미군기지 캠프킴(CAMP KIM)이 있어 주변 환경에 의해 도시와 단절된 곳에 존재한다. 이는 대공분실이라는 용도의 성격상 적합한 장소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한강대로에서 진입이 용이하고 건물 내에서 부지를 조망하기 위해 대지의 북측에 건축물을 배치하였다. 대공분실은 대공용의자 조사를 담당하는 ‘분실동’과 통신 정보 분석업무를 담당하는 ‘AMD동’, 그리고 식당 및 기계 보일러실이 위치한 ‘부속동’으로 구성되었다. 각 건물은 기능에 따라 독립적으로 구성되었다. 5층 규모의 분실동은 남향으로 배치하고 그 좌측으로 2층 규모의 AMD동을 연결하였으며, 부속동은 AMD동 남측에 별도로 배치되었다.
분실동의 지상 3층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위계가 가장 높은 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대공분실 책임자의 업무공간이 위치할 뿐 아니라 고위급 피의자를 조사할 수 있는 특수조사실이 배치되었다. 3층은‘특수조사실, VIP실, ITV 기계실, ITV 모니터실, 실장실, 실장실 전실, 실장 침실, 반장실’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분실동은 AMD동과는 기능적으로 다른 공간이지만, 분실동 3층에 위치한 반장실에서 AMD동 계단실과 연결되며, AMD동 계단실을 통해 AMD동 전층과 연결된다. 지상 3층의 공간구성은 1983년 증축 이후 책임자의 공간이 7층으로 이전함에 따라 공간 구성에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나, 현재로는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지상 3층은 남영동 대공분실의 본부에 해당하므로 5층 조사실 못지않은 중요한 장소이다. 특수조사실은 고위급 피의자를 조사하기 위한 공간이며, 벽면 마감이‘유공합판 위 V.P. (비닐페인트)’인 것을 볼 때 차음을 고려하여 계획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VIP실도 3층 약전평면도에서 감시용 카메라가 설치된 것을 확인되므로 고위급 피의자를 조사하기 위한 공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벽면 마감은 특수조사실과는 달리‘고급흡음벽지’로 기재되어 있다. 지상 3층 동측에 위치한 ITV 기계실 및 ITV 모니터실은 3층과 5층에 위치한 피의자 조사실에 설치된 감시용 카메라로부터 영상과 음향을 수신하는 장소이자 감시하는 장소다. 1976년 원도면에 수록된 약전평면도를 살펴보면, 지상 3층의‘특수조사실, VIP실’, 그리고 지상 5층에 위치한 18개의 조사실에 설치된 감시카메라의 배선이 모두 지상 3층의 ITV 기계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분실동의 4층은 주로 대공간이 계획되었다. 회의실과 전실, 그리고 영사실이 있으며 두 개의 예비실이 배치되어 있다. 4층부터는 분실동 측면의 매스가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내부공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동측에 위치한 예비실의 가운데 기둥이 노출되어 있으며, 서측에 위치한 회의실에서는 3층까지 존재한 AMD동의 계단실의 외벽 중 한 면이 4층부터 기둥으로 연장되어 공간 활용 측면에서 효율적이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4층의 공간구성에서 넓은 공간 곳곳에 위치한 기둥은 조형적 측면에서 외관을 만드는 과정에서 내부 공간구성보다는 외부형태 유지를 위해 구조가 사용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분실동의 5층에는 18개의 조사실과 피의자용 계단 및 승강기와 연결되는 검색실이 배치되어 있다. 조사실은 중복도를 기준으로 남측과 북측에 2열로 나열되어 있으며, 남서측부터 남동측, 그리고 북서측에서 북동측 방면 순으로 숫자가 기입되어 있다. 중복도의 중심거리는 2,000mm로 최소의 폭으로 계획되었으며 조사실의 출입문이 부딪히지 않도록 엇갈리게 계획하였다.18개의 조사실 내부에는 욕조, 세면대, 양변기 등 물을 사용하는 공간과 침대, 책상, 의자가 각 방마다 계획되어 있다. 욕실은 개방구조로 만들어졌으며, 주황색계열을 타일로 마감되었다. 박종철 고문사건 이후 사건 현장 이외의 욕실에서는 욕조를 없앴다. 조사실의 공간구성과 가구배치는 조사실의 너비에 따라 실내 공간의 배치형태가 두 가지로 나뉜다. 조사실의 너비는 크게 폭이 2,500mm와 3,000mm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그 중 2,500mm의 너비를 가진 조사실은 출입문 맞은편 벽면 방면으로 욕조와 세면대 및 양변기가 배치되고 그 앞으로 침대와 책상이 배치된다. 3,000mm를 초과하는 너비의 조사실은 출입문의 대각 방향으로 욕조와 세면대 및 양변기가 배치되고, 출입문의 맞은편 벽면에는 침대가 있으며 출입문의 좌측 벽면에 책상과 의자가 배치되어 있다.
분실동의 5층 조사실은 다른 층과 달리 부분평면 및 전개도까지 작성되어 있다. 해당도면에는 5층 조사실 평면도와 함께 조사실의 실내 입면 전개도가 조사실 내부 배치 유형에 따라 구분되어 작성되어 있다. 조사실의 입면 전개도를 살펴보면, 내부 벽체 마감은 방음을 고려하여 유공합판에 페인트로 마감하였으며 물을 사용하는 부분에는 방수 몰탈에 페인트 마감을 하였다. 걸레받이는 100mm 높이의 고무판을 사용하였는데, 업무공간에서 걸레받이에 고무판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이래적인 재료 사용이다. 욕실밖으로 물이 튈 경우 유지관리에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한 재료사용으로 판단된다. 욕실에는 벽면과 난간에 세라믹 타일로 마감하였다. 출입문은 1.2mm 두께의 철판을 사용한 철제 방음문이 사용되었다. 출입문이 위치한 벽면과 창문이 위치한 벽면 상부 모서리(벽체와 천장이 만나는 곳)에는 사선으로 돌출되어 마감되어 있다.
ITV 카메라 설치 여부를 확인한 부분상세도에서는 추가로 조사실의 출입문과 관련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사실의 출입문에는 감시구멍이 있는데, 일반적인 출입문과 반대 방향인 외부에서 내부를 관찰할 수 있도록 ‘어안렌즈’를 설치하도록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조사실 출입문은 실내 복도 방면에서 진입하는 것으로 단열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조사실 내부에서 새어나가는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방음용 단열재’를 채워 넣도록 하였다. 당시에는 건축법에서 단열규정이 없었으므로 이때 사용된 단열재는 방음용으로 사용된 것이 확실해 보인다. 또한 출입문 하부의 문 프레임 틈에도 '방음용 고무 바킹’을 설치하여 소음이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하도록 계획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출입문에서 세어나가는 소음을 방지하기 위한 상세는 외벽 창에서도 동일하게 처리되어 있다.
조사실의 출입문과 창 이외에 내부 벽체에도 방음 처리가 이루어 졌음을 상세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해당 도면에서는 조사실 내부 벽체의 단면과 입면 상세를 확인할 수 있다. 입면 상세를 통해서는 유공합판 제작을 위한 상세 치수를 확인할 수 있다. 유공합판은 두께 6mm의 합판에 원형으로 타공하여 600mm 너비의 모듈로 제작하고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 조사실과 조사실 간 위치한 내부 벽체의 단면을 살펴보면, 마감재로 유공합판이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해당 단면 상세도에서의 유공합판 외에 다른 방음처리와 관련된 부분을 살펴볼 수 있다. 조사실 간 칸막이 벽체는 단열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조적재와 마감재 사이에 단열재를 밀실하게 채워 넣도록 설계되어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다른 공간과 달리 5층 조사실에는 폭 300mm의 좁은 수직창이 계획되었다. 하나의 조사실에는 두 개의 수직창이 계획되어 있고 양측 끝에 위치한 조사실에는 하나의 수직창만 배치되어 있다. 이는 조사실 내부 체적에 비해 작은 창이 계획되어 채광과 환기에 매우 불리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 전체 공간 중 5층 조사실에만 환기구가 설치하도록 계획되어 있음을 도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치열은 1921년 9월 15일 경상북도 달성 출생으로, 1943년 9월 일본 주오(中央)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43년 7월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데 이어 1945년 4월 일본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광복 후 귀국하여 1946년 대구지검 검사로 검찰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전쟁 중 피난 수도 부산에서 부산지검 차장검사를 지낸 후 1954년 9월 서울지검 차장검사, 1956년 9월 법무부 검찰국장을 거쳐 40세가 되기 전인 1958년 서울지검장이 되었다. 4·19혁명이 일어나고 얼마 뒤인 1960년 9월 서울지검장에서 물러나 10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70년 1월 중앙정보부 차장에 임명되었다. 중앙정보부 차장 재임 중이던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으며, 1973년 10월에는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기도 했다. 1973년 12월 제13대 검찰총장이 되었고, 검찰총장 재직 중이던 1974년 4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일어났다. 1975년 12월 제37대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후 새마을운동의 주무장관으로서 특히 농촌주택 개량운동에 주력했다. 1976년에는 치안본부 소속 남영동 대공분실(보안분실)을 설치했으며, 치안본부 특수수사대를 사직동 팀(특수 1대)과 신길동 팀(특수 2대)으로 분리해 사직동 팀이 박정희의 특명사건을 수사하게 했다. 1978년 12월 법무부 장관으로 부임하여 1979년 12월 13일 퇴임했다.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시작해 법무부 장관으로 퇴임할 때까지 약 10년간 박정희 정부의 권력 핵심부에 있었다. 박정희 정권을 지탱한 주요 기관의 수장을 거쳐온 김치열의 이력에 비추어 볼 때, 대공분실을 신설한 목적은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다. 특히 눈여겨볼 점은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경험이 있는 김치열이 내무부 장관 부임 후 박정희의 ‘10월 유신’을 지탱하는 수단으로 경찰조직을 이용하여 대공업무를 전담하는 조직을 신설하고, 전담조직을 위한 전용건물을 당대 최고의 건축가에게 의뢰했다는 점이다. 김치열이 남영동 대공분실의 건축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은 정초석에 자신의 직함과 이름을 직접 새겨 넣었다는 점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박정희 정권에 충성을 바쳤던 김치열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사망 후 12.12사태로 집권한 신군부에 의해 해임되었다
1931년 함경남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1950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밀항하여 도쿄예술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도쿄대학교 대학원에서 다카야마 교수에게 수학하던 중 1959년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에서 박춘명 등과 팀을 구성하여 1등에 당선되었고, 이를 계기로 귀국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시작된 남산 국회의사당 설계는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후에도 지속되었으나 1961년에 발발한 5.16군사정변으로 실시설계 마지막 단계에서 중단되었다. 비록 국회의사당 설계가 무산되긴 했지만, 이 시기에 김종필과 인연을 맺은 덕에 워커힐호텔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장충동 자유센터, 세운상가, 여의도 및 한강연안 개발 프로젝트, 국립부여박물관 등 1960년대 박정희 시대를 상징하는 국가 프로젝트 대부분을 수주했다. 김수근이 남영동 대공분실의 설계를 맡은 배경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당시 정계와 밀접한 인연을 맺었던 점이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남영동 대공분실 외에 중앙정보부 건물도 김수근의 설계로 지어졌으나 10.26사태로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중앙정보부로 사용되지 못했다. 1960년대 김종필로 대표되는 집권세력과의 인연이 1970년대에도 지속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의 설계를 맡은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