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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기억과전망'

기억과 전망 54호

  • 2026 | 관리자
  • 조회수 :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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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사(人間事)는 정치를 피할 수 없다. 제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면 정치를 모든 악의 근원으로 보는 비 (非)-정치나 탈-정치의 관점을 채택할 수 없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는 욕구를 온전히 만족시키는 것이 윤리라고 할 때 윤리는 정치라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매개를 필요로 한다.


    현대철학자 장 라드리에르(Jean Ladrière, 1921~2007)는 정치 권력에 내재한 속성으로서 매개와 불투명성을 강조했다. 사회적 삶은 개인 간의 직접적 관계의 경험으로부터 만들어진 이상을 확장함으로써 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는 개인적 행동들이 서로 교차하고 반향하도록 매개하는 체계이다. 사회에서 개인의 행동은 상대적으로 강제성을 갖춘 방식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회는 마치 제2의 자연처럼 자기만의 관성, 불투명성, 자기 고유의 역학을 갖는다.


    이런 점은 정치권력의 역설을 드러낸다. 권력은 자기 고유성을 갖기 때문에 확장되고 점점 더 자의적이 되어가며 구성원들의 제어를 벗어나고 나아가 그들을 국가의 의지에 종속시킬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정치권력의 자의성에 제한을 가해야 한다는 점이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이는 국가가 제한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그 정확한 규정을 수용한다는 조건에서 비로소 유효성을 갖는다. 권력은 제도 속에서 구체화되면서 대상화, 사물화, 불투명화라는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게 된다. 특히 정치가 개입시키는 고유의 매개들, 즉 권력의 매개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목적 자체로서 제시되고 이런 목적은 권력 투쟁에 속하는 것과 분리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속성을 지닌다. 역사적으로 권위주의의 신봉자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정치권력에 내재한 불투명성의 틈새를 파고 들어왔다.


    2024년 12·3 내란 사태도 예외가 아니다. 사태의 주동자들은 외관상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를 견디지 못하고 마치 유일한 타당성을 보유한 것처럼 힘에 의거하여 대립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하려는 문턱에서 대한민국은 힘겹게 그 진입을 막아냈다. 자유주의의 기반을 이루는 다원주의는 대립에 대한 관용, 차이의 권리, 사상과 예술의 다양성을 통한 사회의 입체성을 추구하고 사유, 언어, 행동의 통제에 의한 평정보다 자유로운 대화로 인한 대립의 혼란을 공적 효용으로 보는 관점이다.


    여러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체제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에서도, 정치권력의 불투명성이 내포한 위험 때문에 통제, 분할, 참여, 탈중심화, 균형, 제도화, 사법적 안정, 역량의 규정, 자의성의 감소, 실질적 자유의 보증, 법 관념 등은 원리적으로 정당화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제한의 합법적 절차가 정치권력에 의해 승인되어야 한다는 역설은 그대로 남아 있다. 권력의 이런 속성 때문에 민주주의조차도 많은 전문가에 의해 최고의 제도라기보다는 ‘가장 덜 나쁜’ 제도로 여겨진다. 아마도 12·3 사태 극복 과정의 큰 의미는 대한민국이 권력의 불투명성을 제어하기 위한 다양하고 복잡한 절차를 폭력의 분출 없이 합법적으로 수행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와 4일 새벽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한 가결, 12월 14일 탄핵소추안 가결, 2025년 1월 내란 우두머리의 구속과 3월의 구속 취소, 4월 4일의 탄핵선고, 6월 3일의 조기 대선, 정권교체, 본격적인 내란 수사와 주동자들의 구속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제도적 단계와 우여곡절을 거치며 결국 국정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고, 사후 처리를 위한 사법 절차도 계속 진행 중이다.


    이렇게 볼 때 대한민국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는 큰 틀에서 온전히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왜 내란이 일어났고, 만일 내란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역사 공동체는 일제 강점기, 전쟁, 독재 등 권위주의의 위험을 숱하게 겪었다. 권위주의에는 전체주의의 망령이 도사리고 있다. 실제로 12·3 계엄사령부 포고령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허울 아래 모든 조항이 전체주의를 향하고 있다.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 행위”를 금하고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포고령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14조(벌칙)에 의하여 처단한다”. 포고령은 정치적 다 원성의 금지와 의견의 다양성에 대한 통제를 명시하고 있다. 포고령에 제시된 ‘자유민주주의’는 실상 국가를 모든 의지의 통합체이자 모든 의미의 독점체로서 국가 자체 외의 무엇에 의해서도 판단 받지 않는 최고 심급으로 설정하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와 다르지 않다.


    역설적으로 민주주의 사회와 전체주의 사회의 대립은 민주주의의 관건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안티테제(antithese)’에 의거하여 우리 사회 전반에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환경, 즉 ‘문화적 차원’ 이 조성되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는 “왜 내란이 일어났는지” 다시 숙고하며 근원적인 예방책을 마련하는 길이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남용을 제한하는 제도적 장치 외에도 공동체의 향방에 관한 진정한 토론의 장(場)을 확보할 것을 요청한다. 토론에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행동과 관련하여 온전한 확실성은 없고 비-결정의 공간이 열려 있으며, 따라서 의견의 대립과 다양한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합의는 원칙적으로 가능 하지만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공유할 확실성에 속하지 않는 입장은 항상 유지될 수 있다.


    민주주의가 요청하는 문화적 차원은 신념과 불확실성을 화해시켜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내포한다. 그러나 어떤 신념이 다른 가능한 신념들 가운 데 하나의 의견으로 여겨지고, 다양한 신념이 그 역사성과 더불어 논의될 경우 구성원들의 사유가 활성화되면서 공동체는 역동성을 누릴 수 있다. 이 경우 특정 이념은 특수한 관점에서 생겨났다는 점, 따라서 모든 이념처럼 일정한 자의성을 통해 표명되고 모종의 역학 관계에서 정초되었다는 점이 드러남으로써 사회 구성원의 사유와 태도가 개방성과 입체성을 갖추게 된다. 이런 사회의 구성원은 타자를 이해하고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문화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 나아가 국가는 공동체에 대한 열린 토론의 독립적인 장을 인정하고 유지할 때 국가 스스로에게 제한을 가하는 것이며 민주주의의 문화를 지원하는 장치가 된다. 이는 차이, 긴장, 이해관계 의 갈등, 다양한 개념들의 충돌을 유해성으로 보지 않고 그 의미를 수용함으로써 사회에 입체성과 역동성을 부여하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무한히 열리는 지평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비관하기보다 대화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모험의 체제여야 한다. 토론은 상대주의를 의미하지 않으며 자신의 입장을 반드시 바꿔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각자가 자신의 입장이 지닌 폐쇄성을 자각하고 그것을 해체할 가능성을 전제할 때 대화는 실질성이 있다. 타자의 입장을 가능한 것으로 고찰함으로써, 타자의 입장에서 나를 볼 때 내 입장의 일방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로부터 각자의 입장에 균열이 생기고 자신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실효성 있는 만남과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 이다. 대화가 생산적이려면 서로가 반드시 동의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을 닫아놓지 말아야 하고, 자기 입장을 긴장 속에 넣어 타 자의 입장과의 맞대면 관계로 설정해야 한다. 대화는 소통을 위해 자기 자신의 개념, 이념, 신념을 재가공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쪽 에 의한 다른 쪽의 동화(同化)만이 남거나 최악의 경우 말의 교환이 힘의 관계로 전환될 것이다.


    12·3 내란 사태의 의미 고찰을 통해 우리 사회가 물어야 하는 것은 ‘민 주주의 문화’이다. 국가에서, 나아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집단에 서 과연 ‘차이’, ‘대립’, ‘간극’, ‘긴장’ 등을 효용으로 여기는 문화적 차원을 수용하고 있는가? 서로 간의 변화에 열려 있는 강한 의미의 대화를 수행하고 있는가? 극소수의 결정을 제도와 절차의 허울 아래 ‘무른’ 대화로 추인하는 권위주의의 가면은 내려졌는가? ‘민주주의 문화’가 조성되지 않을 때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취약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지난 2025년 비상통치와 계엄을 주제로 콜로키움을 개최하는 등 관련 담론을 지속적으로 축적해 왔으며, 이번 학술지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해당 분야의 학술적 쟁점들을 폭넓게 살피고자 했다. 이에 따라 『기억과 전망』 54호는 12·3 사태와 관련한 특집논문 5편과 함께 일반논문 4편과 서평 1편을 실었다.


    특집논문 「한국에서 대통령 탄핵제도의 변화와 민주주의의 발전: 대통령 탄핵의 기준을 중심으로」은 2024년 비상계엄 선포에 따른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사례를 계기로 대통령 탄핵제도가 헌법 수호와 민주주의 발전 에 기여하는 역할을 규명한다. 이를 위해 탄핵제도의 헌법적 기초와 연혁을 고찰하고, 역대 대통령 탄핵 판례 분석을 통해 헌법재판소가 제시하는 ‘법 위반의 중대성’과 민주주의 사이의 상관관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특집논문 「헌법적 예외의 제도화와 군인의 헌법적 책임: 12·3 비상계엄 이후 계엄법과 군인복무기본법 개정 논의를 중심으로」는 2024년 비상계엄 사례를 바탕으로 계엄법과 군인복무기본법이 결합하여 헌법 통제를 무력화하는 ‘규범의 전도’와 ‘이중 국가’ 메커니즘을 규명하고 자문위원회의 논의를 학술적으로 기록한다. 이를 토대로 군인의 판단 공백을 해소하기 위한 법령의 동시 정비와 하위 문서 재설계 등 패키지형 입법 개혁의 방향을 제시한다.


    특집논문 「비상시의 아카이브: 12·3비상계엄 이후 연합의 정치와 시민 자유발언의 수행성」은 2024년 비상계엄 이후 시민들의 에고도큐먼트적 ‘자유발언’을 분석하여, 집단적 선언 위주의 저항 문화가 개인의 발화와 신체적 현존을 통한 민주주의 재구성으로 변모했음을 고찰한다. 이를 통해 비상시의 기록이 국가 폭력에 맞서 삶의 언어를 공적 기억으로 전환하는 ‘대항 아카이브’이자 민주주의의 미래를 사유하는 정치적 장치임을 논증한다.


    특집논문 「12‧3내란에 저항한 10대의 외침과 미래 민주주의」는 12·3 계엄과 탄핵 국면에서 10대들이 경험한 투표권 없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민주주의에 대한 책임 의식을 분석하고, 입시 위주의 구조와 정치적 중립성 규범 등 이들의 참여를 가로막는 사회적 제약 조건을 고찰한다. 이를 통해 청소년들의 집단적 저항과 연대 활동의 가치를 조명하며, 10대의 정치적 참여와 성찰을 보장하기 위한 기성세대의 인식 변화와 사회적 지지의 필요성을 제언한다.


    특집논문 「인간의 품격, 생존의 흉터, 무명(無名)의 예감: ‘비상행동’ 주최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 참여자의 민중과 소수자 정동」은 2024년 12·3 비상계엄 이후 탄핵 집회에 참여한 아이돌 팬과 농민, 성소수자 등 다양한 시민들의 발언을 통해 문화적 동기에서 비롯된 참여와 ‘계엄이 일상’이었던 소수자들의 연대 과정을 고찰한다. 이들은 역사의 증인이자 이름 없는 존재로서 느끼는 자각을 바탕으로, 소외된 이들이 외롭지 않은 세상과 존재의 품격을 지키기 위한 실천적 의지를 드러낸다는 점을 밝힌다.


    일반논문 「1980년 헌법의 개정논의와 그 성격」은 현행 헌법의 모태가 된 1980년 헌법의 개정 과정을 분석하여, 5·17 비상계엄 이후 군부가 비밀리에 주도한 개헌이 민주화 흐름을 역행시키고 군사주의 국가 건설을 정당화했음을 규명한다. 이를 바탕으로 1980년 헌법에 잔존하는 권위주의적 유산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며, 향후 개헌 시 실질적 민주주의를 온전히 구현하기 위한 헌법적 방향성을 제시한다.


    일반논문 「5·18민주화운동 이후 기억의 재구성: 홍성담의 <대동세상-1>(1984) 작품 연구」는 홍성담의 판화 <대동세상-1>을 중심으로 5·18민주화운동의 기억이 저항과 연대의 시각적 상징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고찰 하고, 주먹밥 등으로 변화해 온 도상의 확산 과정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강력한 상징적 이미지가 5·18의 승리적 서사를 공고히 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사건이 지닌 다층적이고 주변적인 서사들을 소외시킬 수 있음을 비판적으로 규명한다.


    일반논문 「여성주의 자치기구의 폐지는 왜 반복되는가: 중앙대학교 총여학생회 및 성평등위원회 폐지 사례 분석」은 중앙대학교의 여성주의 자 치기구 폐지 과정을 추적하여 제도적 취약성과 적대적 정동이 결합된 해체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여성주의 정치를 남성 중심적 질서 안에서 재현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하는 담론 구조를 비판적으로 규명한다. 이와 동시에 폐지 과정에서 발생한 연대의 정동이 제도 바깥에서 재배치되며 지배 담론에 저항하는 양상을 고찰함으로써 여성주의 정치의 제도적 조건에 대한 사유의 기초를 제공한다.


    일반논문 「시민교육 현장의 사회교육 실천원리 특성에 관한 연구」는 국가 중심의 사회문제 해결 방식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시민 참여를 강화하기 위한 시민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통합적인 실천 원리 체계의 부재를 지적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교육의 실천 원리를 분석 틀로 삼아 시민단체·학교·지자체의 현장 실태를 분석하고 시민교육의 발전을 위한 이론적 함의와 실천적 시사점을 도출한다.


    서평 「민주화운동사 연구에 있어 ‘김대중 망명일기’의 학문적 가치」는 유신 선포 직후 김대중의 1차 망명 활동을 기록한 친필 사료인 ‘김대중 망명일기’를 토대로 1973년 납치사건의 배경과 원인을 규명하고 유신 정권 초기 민주화운동사를 재구성함으로써 유신체제의 균열과 몰락을 초래하 는 역사적 전환점을 논구한다.


    통찰이 담긴 옥고를 투고해 주신 저자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2026년 5월

    편집위원회를 대표하여

    이근세

목차 정보

목차 정보 테이블
번호 목차제목 글쓴이 다운로드
1 한국에서 대통령 탄핵제도의 변화와 민주주의의 발전 임지봉
2 헌법적 예외의 제도화와 군인의 헌법적 책임 강성현, 김종철
3 비상시의 아카이브 임유경
4 12·3내란에 저항한 10대의 외침과 미래 민주주의 김아람
5 인간의 품격, 생존의 흉터, 무명(無名)의 예감 김대현
6 1980년 헌법의 개정 논의와 그 성격 조병주
7 5·18민주화운동 이후 기억의 재구성 홍윤리
8 여성주의 자치기구의 폐지는 왜 반복되는가 송지현, 백승욱
9 시민교육 현장의 사회교육 실천원리 특성에 관한 연구 이슬기
10 민주화운동사 연구에 있어 ‘김대중 망명일기’의 학문적 가치 장신기